동영상 소개
◀ 앵커멘트 ▶
평양장로회신학교 1회 졸업생으로
최초의 한국인 목사 7인 중 한 명.
한국 최초의 선교사로
제주 선교의 초석을 일군 인물.
일제의 신사참배에 거부했단 이유로
고문받고 세상을 떠난 순교자,
바로 이기풍 목사인데요.
최근 이기풍 목사에 관해 알려져 있는 상당 부분이
잘못됐다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권지연 기잡니다.
◀ 리포트 ▶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에 들어가 첫 번째로 세운
성안교회 선교기념비에 적힌 내용의 일부입니다.
최근 이기풍목사 기념사업회 창립총회에서
이기풍 목사의 직계증손자인 이준호 목사는
이기풍 목사 연보와 관련해 지금껏 알려진 것과 다른 주장을 폈습니다.
이기풍 목사의 출생일과 수세일,
평양신학교 입학일, 제주도로 출발해 도착하는 과정,
제주도에서 첫 예배를 드리기까지의 경과가
지금껏 알려진 사실과 다르다는 겁니다.
[이준호 목사 / 이기풍 목사 직계증손자]
이는 막내딸 이사례 권사가 쓴 순교보를 통해 알려진 내용과
대치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목사는 집안에서 보관중인 족보와 호적 등의 자료에 따르면
이기풍 목사의 출생일이
지금껏 알려진 1865년보다 3년 늦은, 1868년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로 향하는 배에 승선한 때도
1907년이 아닌,
1908년 2월 20일-25일 사이일 개연성이 높다고 주장합니다.
1908년 1월 24일 제물포행 기차에 올랐다는
예수교회보에 기술된 내용과 어려 정황을 미루어 볼 때
추정가능하다는 겁니다.
이밖에도 이기풍 목사가 친필로 쓴 가족 족보를 통해
이기풍 목사의 가문이 무관 집안으로서
할아버지는 정 3품에 속하는 오위장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여기에 흔히 이기풍 목사가 개심 이전에
석전 패거리의 우두머리, 혹은 깡패 등으로 표현돼
직업이 없는 한량이었던 것처럼 알려져 왔지만
이 또한 사실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이만열교수의 저서와
마팻 선교사가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에서
한국인 첫 목사들을 소개한 내용으로 볼 때,
이기풍 목사는 외세로부터 민족을 지키고자 했던
민족주의자 였다는 겁니다.
마포삼열 선교사 턱 아래 난 상처도
이기풍 목사가 던진 돌에 맞아 생긴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는 서양인에게서 나타나는 신체적 특징에 불과했다는 겁니다.
1934년 마포삼열 선교사가 한국선교 50주년을 맞아
기술한 내용에서 알 수 있다고 전했습니다.
한국기독교문화유산보존협회는
이준호 목사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며
이기풍 목사 기념 사업회 창립에도 발 벗고 나섰습니다.
[임영근 사무총장 / 한국기독교문화유산보존협회]
이기풍 목사의 연보와 관련해
후손들과 학자들 간의 의견은 분분하지만
이를 둘러싸 갈등을 빚기 보다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그 본질을 찾아가는데 집중해야겠습니다.
CGN투데이 권지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