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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말씀으로 종교개혁 꽃피운 츠빙글리

1345등록 2016-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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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멘트▶

지난 주 얀 후스의 종교 개혁과
삶을 전해드렸는데요

오늘은 이로 부터 100년간 간직해 온 개혁의 씨앗을
스위스에서 활짝 꽃 피운
울리히 츠빙글리의 삶과 정신을 전해드립니다.

◀리포트▶

실천적 종교개혁자로 평가되는 울리히 츠빙글리는
마틴 루터와 같은 해인 1484년,
스위스에서 비교적 부유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루터가 복음 안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진 후
타오르는 의분으로 로마 카톨릭의 부정부패에 맞섰다면
츠빙글리는 교회의 부정부패를 학문적으로 공격했습니다.

1506년, 성직자로 부임한 그는
서른이 넘을 때까지 10년간 경험과 지식을 습득했고

인문학의 왕자로 불리는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인문주의에 입각해 성서 연구의 기반을 구축한 후
철저히 성경에 입각해
로마교회의 악습을 뒤집는 설교를 했습니다.

교회에 등을 돌리고
영적 빈곤에 시달리던 대중들의 반응은 뜨거웠고
취리히 시의회는 모든 성직자들에게
츠빙글리의 설교를 따라하도록 요구했습니다.

이 후 1522년, 사순절 금식 기간에 한 인쇄업자가
교황의 법령을 어기고 소시지를 먹은 것이 화근이 돼
츠빙글리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됐습니다.

츠빙글리는 전통을 깨고
성경 어디서도 고기를 금하지 않는다며
복음의 본질에 입각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선포했습니다.

히브리어에 능숙해 성경 원문을
풍부하고 정확하게 알 수 있었던 그는
관행과 진리 사이의 균형을 잡고
당대 교회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기에 충분했습니다.

이 밖에도 그는 용병 매매 사업 중단,
상처 입은 영혼 치유, 성상 폐지,
성직자의 결혼 허용, 면죄부 매매 비판 등에
열심을 냈습니다.

츠빙글리는 1531년 카피아 전투에서
군목으로 참전해 전사하고 말았지만
그가 전한 복음 안에서의 참 자유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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