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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신앙의 절개를 지켜 믿음의 본을 보이다

1231등록 2018-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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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멘트▶
신앙의 선조들은
유교와 불교가 가득한 조선시대에
믿음을 어떻게 지켜냈을까요.

기독교를 서양 오랑캐의 종교라고 손가락질하던 사람들에게
순교의 영성을 보여준 이원영 목사를 소개합니다.

보도에 박건희기자입니다.


◀리포트▶
유교적 색채가 강했던 안동 지역은
1883년 선교사가 첫 발을 내디뎠지만

25년이 지난 1908년이 돼서야
안동읍에 교회가 처음 세워졌습니다.

1886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이원영 목사 역시
전통 유교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당시 양반들은
기독교를 서양 오랑캐의 종교라며 손가락질했습니다.

[인터뷰] 주승민 교수 / 서울신학대학교 일반대학원 역사신학

1919년 3.1운동을 맞아
안동 예안읍에서도 만세시위가 열렸습니다.

유생들의 주도로 열린 만세시위에
이원영 목사도 참석해 서울 서대문 형무소로 끌려갔습니다.

당시 예수를 믿지 않던 이 목사는
옥중에서 동향출신 이상동 장로를 통해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1년 후 출옥한 이 목사는
세례를 받은 후 안동에 섬촌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하지만
퇴계 이황의 14대 손이자 전통 유교에서 자라난 이가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습니다.

가족들은 이원영 목사를 족보에서 제거하겠다고 위협했으며
양반 어른들은 도끼를 들고와 교회 기둥을 찍고 파손시켰습니다.

하지만 이원영 목사는
결코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인터뷰] 주승민 교수 / 서울신학대학교 일반대학원 역사신학

1939년 5월 31일
신사참배를 거부한 이원영 목사는
안동경찰서에 잡혀가 혹독한 고문을 겪고 풀려났습니다.

이후 계속된 신사참배 요구에도
하나님 외에 그 누구에게도 절할 수 없다며
따르지 않았습니다.

또 창씨개명를 거절하고
일제 말기 황민화 정책을 반대해
4차례나 수감됐습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순교의 영성을 보여준 이원영 목사를 통해

기독교를 향한
안동 지역 사람들의 인식이 변화됐습니다.

이 목사는 4차례 수감 기간 중에도
70여 명에게 복음을 전해 전도에도 열심을 다했습니다.

[인터뷰] 주승민 교수 / 서울신학대학교 일반대학원 역사신학

이원영 목사는
일제 해방 후 경안고등성경학원을 설립해
후학 양성에 뜻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옥고로 인한 후유증으로 인해
3년간 투병생활 후 1958년 6월 21일
73세로 삶을 마쳤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신앙의 선조들.

나를 내어놓는 순교의 영성이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케합니다.

CGN투데이 박건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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