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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5등록 2019-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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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전 세계 교회 소식을 전해 드리는 월드리포트입니다.
지난 목요일은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소천한지 1년이 되는 날이었는데요. 그에게 헌정된 박물관에서 그레이엄 목사가 남긴 유산을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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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튼 칼리지 캠퍼스에 있는 빌리 그레이엄 박물관은 그레이엄 목사의 삶과 사역을 조명합니다. 그러나 생전 그레이엄 목사는 자신에게만 집중되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에드 스테처 사무총장 빌리 그레이엄 센터
“그레이엄 목사님은 글을 위한 장소를 원했어요. 그리고 박물관이 어때야 하는지 이야기했습니다. 그의 사역에서 시작해 넓게는 미국 복음주의라는 관점에서 논의했죠. 그러니까 이곳은 미국 복음주의 박물관입니다.”

박물관이 자리 잡은 휘튼 칼리지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졸업한 학교입니다.

에드 스테처 사무총장 빌리 그레이엄 센터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휘튼 칼리지의 가장 유명한 졸업생입니다. 빌리와 루스는 이곳에서 학생으로 만나 결혼했습니다. 빌리 그레이엄 센터는 이곳에서는 예수님을 중요시한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가시적이고 영적으로 상기시키는 장소입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예수님을 높였고, 학생들도 이곳에서 나가면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기를 원합니다.”

1981년에 개관한 박물관은 사도 바울, 존 위클리프, 마틴 루터 같은 전도자들도 다룹니다. 그레이엄 목사에게 헌정된 전시장에는 그의 사진과 개인적인 수집품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또 수많은 전도 집회 현장을 사진과 영상으로 정리했습니다. 박물관 측은 전시의 목적이 그레이엄 목사를 넘어 향한다고 말했습니다.

에드 스테처 사무총장 빌리 그레이엄 센터
“전시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복음 전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보게 합니다.”

그레이엄 목사가 소천한 이후에도 박물관을 찾는 사람은 많습니다. 185개국, 2억천5백여 명에게 복음을 전했던 한 사람에 대해 알고자 합니다.

에드 스테처 사무총장 빌리 그레이엄 센터
“사람들이 관심을 보입니다.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도 많이 와요.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세상에서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압니다. 그들이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가리키는 예수의 이름을 알게 되길 원합니다.”

스테처 사무총장은 빌리 그레이엄 박물관이 계속해서 살아있는 전도의 장이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습니다.

에드 스테처 사무총장 빌리 그레이엄 센터
“십자가를 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면 하나님께 영원한 삶이라는 선물을 받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박물관에서 전도 운동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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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다음 소식입니다. 미국에서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의 캐릭터는 인종차별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톰 아저씨의 모델이 된 실제 인물은 특별한 삶을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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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년에 출간된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큰 주목을 받았고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카산드라 알렉산더 박사 노퍽 주립대학교
“그 책은 우리의 정서를 뒤흔들었습니다. 그리고 한 나라로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했죠.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개인들이 노예제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책의 영향력에 대한 반발도 컸습니다.

카산드라 알렉산더 박사 노퍽 주립대학교
“남부 지역에서는 금서로 지정됐습니다. 책을 판매하다가 걸리면 죽임을 당하거나 교도소에 갔습니다. 책이 가져올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컸습니다.”

소설에서는 톰 아저씨를 위엄 있고, 지적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그렸지만 남부 지역에서는 그를 노예 생활을 행복하게 여기는 순종적인 어릿광대로 만들었습니다. 작가인 해리언 비처 스토우도 공격당했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소설 속 인물들의 실제 주인공들에 대해 철저히 기록한 책을 출간해 대항했습니다.

카산드라 알렉산더 박사 노퍽 주립대학교
“조사이어 헨슨은 보기 드문 용기를 보여준 사람으로 설명되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도우려고 했어요. 특히 이 나라의 백인들에게 노예제도의 실상을 이해시키려고 했죠.”

조사이어 헨슨의 메릴랜드주 록빌에서 시작됩니다. 지금은 주택 지역인 록빌은 한때는 드넓은 농장지대였습니다. 헨슨은 아이삭 라일리라는 사람의 노예였습니다. 그는 자서전에 농장주인 라일리의 잔인함을 보여주는 여러 일화를 남겼습니다. 어느 날은 라일리가 9살이었던 헨슨의 모자 속에서 문법책을 발견했습니다.

제이미 쿤스 역사학자
“라일리는 책을 보자마자 격분했습니다. 노예가 읽고, 쓰는 법을 배우는 일은 없었으니까요.”

조사이어 헨슨 목사의 자서전 중
‘그는 책을 들라고 고함치면서 끔찍한 욕설을 퍼부었다. 결국 나는 책을 들었고, 안구가 부풀어 의식을 잃을 때까지 머리와 등을 맞았다’.

혹독한 처우에도 헨슨은 신뢰할만한 일꾼이라는 것을 증명해 농장을 감독하는 위치까지 올라갔고, 동료 노예들의 처우를 개선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18살이었을 때는 부흥 집회에도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지만 그의 인생을 바꾸는 설교를 들었습니다.

조사이어 헨슨 목사의 자서전 중
‘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나의 마음을 만졌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었는지 부르짖었다. 다시 또다시, 전도자는 ‘모든 사람을 위해’라는 말을 반복했다. 사랑받는다는 감정은 은혜롭고, 다정했다.’

제이미 쿤스 역사학자
“그 일은 그에게 큰 의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항상 자신의 편이 되어주시며, 그를 구원하시고, 그의 인생의 계획을 결정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이후 헨슨은 가족과 동료 18명과 함께 켄터키에 있는 아이삭 라일리의 형제의 집으로 옮겨갔습니다. 켄터키로 향하는 길에 오하이오주 신시내티를 거치면서 그의 성실함은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오하이오주는 노예제도를 인정하지 않는 자유주였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에게 머물 것을 권했지만 그는 강경했습니다. 그리고 헨슨은 그 결정을 후회했습니다. 켄터키에 정착한 지 3년이 됐을 때, 그와 함께 왔던 사람들은 경매에 부쳐졌습니다.

조사이어 헨슨 목사의 자서전 중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이 영원히 헤어졌다. 그때부터는 나는 노예 제도를 증오하고, 저주했다. 나의 영혼은 하나의 목적에 몰두했다. 자유와 자기권리를 얻는 것, 방종한 폭군의 잔인한 변덕에서 구원받는 것.'

헨슨은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었지만 결국 탈출 외에는 답이 없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1973년에 도망노예송환법(Fugitive Slave Act)이 제정되면서 헨슨은 가족을 데리고 캐나다로 도망쳤습니다.

자레드 브록 작가
“6백 마일의 여정이었습니다. 아내와 4명의 아이를 데리고, 걸어서 이동해야 했죠. 낮에 자고, 밤에 움직이는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캐나다로 가야만 했습니다. 그가 자유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습니다.”

헨슨 가족은 북극성에 의지해 이동했고, 40일 만에 이리호(Lake Erie)에 도착해 캐나다로 건너갔습니다. 그는 온타리오에서 당시에는 생소했던 다인종 학교와 흑인 정착지를 만들었습니다. 또 미국 전역에서 모금 활동과 강연을 펼쳤습니다. 그런 가운데 목숨을 걸고 118명의 노예를 캐나다로 구출했습니다.

자레드 브록 작가
“저에게는 개인적으로 영감을 주는 사람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듣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자유를 잘 사용하길 바랍니다. 우리의 자원, 시간, 돈, 에너지, 목소리, 영향력을요. 우리만큼 가지지 못했던 사람들을 대신해 사용하길 바랍니다.”

헨슨은 말년에 자신이 한때 일했던 농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삶은 너무나 고통스러웠지만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었던 자신을 발견했다는 글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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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CBN과 함께 하는 월드리포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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