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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조선을 사랑한 푸른 눈의 선교사, 아펜젤러

570등록 2016-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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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내일은 우리나라에 들어와
복음을 전하는 데 앞장서온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 선교사의 소천일입니다.

그가 한국 땅을 밟은 지도
벌써 131년째가 되어가고 있는데요.
아펜젤러 선교사의 삶과
선교정신을 돌아봤습니다.

보도에 신소라 기잡니다.

◀리포트▶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태어나
감리교의 대표적인 목사로 이름을 알린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

1885년 당시 27살이었던 그는
조선에 복음을 전하겠다는 마음 하나로
갓 결혼한 아내와 선교동역자인 언더우드와 함께
조선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4월 5일 부활절
인천 제물포에 무사히 상륙한 그는
하나님을 향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자막 :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자유와 빛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하지만 선교사역을 시작하기도 전에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아펜젤러 부부는 일주일 만에 일본으로 피신해야만 했습니다.

그로부터 석 달 뒤인 1885년 7월 19일.

아펜젤러 선교사는 다시 조선에 들어와
조선 최초의 서양식 학교인 ‘배재학당’을 세우고

성경과 영어를 비롯한 인문, 자연과학 등
근대 교육의 교과목을 가르쳤습니다.

배움의 기회가 적었던 당시
사람들은 배재학당을 통해 지식인, 독립운동가가 되어
애국활동에 뛰어들기도 했습니다.

[인터뷰: 박찬정 학예연구사 / 배재학당역사박물관]
: 배재학당을 다녔던 분들 특히 아펜젤러 선교사와 인연을 맺고
아펜젤러 선교사가 특강강사로 초빙한 서재필과 인연을 맺었던 분들 중에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 주시경 선생님 이런 분들이 계십니다.
이런 분들은 비슷한 시기 1894년 정도에 배재학당에 들어와서
우리나라 최초의 학생회인 협성회를 만들고
독립협회라든지 독립신문 이런 쪽에 관여도 하게 되고요.

아펜젤러 선교사는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1887년 벧엘예배당을 설립했습니다.

훗날 예배당은
오늘의 정동제일교회의 모체가 됐고
이곳을 통해 기독교를 믿는 조선인들이
많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뷰: 오영교 장로 / 정동제일교회 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 (아펜젤러 목사님은) 본인이 정말 이 나라를 사랑하셨어요.
다른 교단의 목사님과는 달리 조선인 목사님들을 많이 키우셨어요.
그래서 최병헌 목사님을 포함한 한국의 여러 초기의 목사님들이
이 교회에서 많이 양성이 되었고 기독교의 조선적 변형을 이루는데
기여를 하신 분이 아펜젤러 목사님이십니다.

또 언더우드와 게일, 스크랜튼 선교사 등과 함께
성서번역위원회인 ‘상임성서실행위원회’를 구성해
한글 성경 번역과 보급에 힘을 쏟았습니다.

당시 성경 보급은
조선의 문맹률을 낮추는데 기여했습니다.

[인터뷰: 전무용 국장 / 대한성서공회 번역실]
: 사실은 성경을 읽으면서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문맹에서 벗어났습니다.
초기 1890년 전후에 문맹률이 90%였다고 하는데 성경이 계속해서 보급되면서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책이 생겼고 그것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세상을 만났습니다.

17년 넘게 조선에서 선교사역을 펼쳤던
아펜젤러 선교사는
1902년 6월 11일 성서번역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배를 타고 목포로 향하던 중
충돌사고로 인해
44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습니다.

당시 배 위층에 있어 얼마든지 살 수 있었지만
같이 동승했던 조사 조한규와 정신여고 학생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었던 아펜젤러 선교사.

자신의 목숨보다 조선을 더 사랑했던 그의 헌신이
오늘날까지 많은 크리스천들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CGN 투데이, 신소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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