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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고아들의 영원한 엄마, 마리 위더슨

884등록 2016-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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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오갈 곳 하나 없는 조선의 고아들을
사랑으로 돌보며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이 무엇인지 보여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구세군 출신의 마리 위더슨 선교사인데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성경말씀을 따라 산
그의 삶은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보도에 신소라 기잡니다.

◀리포트▶
1898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마리 위더슨 선교사는
부모를 따라 남아프리카로 건너간 뒤
27살 선교에 뜻을 품고 구세군 사관이 되었습니다.

조선에 복음전파가 절실하다는 소식을 접한 그녀는
같은 구세군 출신인 크리스 위더슨 선교사와 결혼한 후
그와 함께 조선으로 향했습니다.

조선에서 할 수 있는 것과
해야만 하는 사역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밤낮으로 기도해온 그녀의 눈에
굶주림에 허덕이는 고아들이 들어왔습니다.

위더슨 선교사는
서울 변두리에 보육원을 운영하며
갈 곳 없이 방황하는 어린 아이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길거리 생활을 해온 고아들로 인해
항상 전염병 위험이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직 주의 사랑으로
이들을 돌봐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이재성 사관 / 한국 구세군 역사]
: 위더슨 부부는 서울 변두리에다가 고아원을 차린 후
줄곧 거기서 생활했습니다. 고아원이라고 해서 고아들만 모아 놓지 않고
아예 거기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것이죠. 길거리 고아들이 여러 가지 병균을 묻혀 와
발진티푸스에 걸려 고열로 고생했을 때도 이들 부부는 고아들 걱정으로 가득했어요.

위더슨 선교사는 자신의 첫아들을
고아들과 함께 자라게 하며
많은 이들의 엄마가 돼주었습니다.

그렇게 7년 동안 보육원을 운영하며
갈 곳 없는 아이들의 천사가 되어준 위더슨 선교사는
구세군의 요청에 따라 1934년 아프리카 케냐로 파송됩니다.

그곳에서도 7년간 아프리카 고아들을 돌보는 일에
혼신을 다했던 그녀는
1953년 1월, 다시 한국으로 향했습니다.

한반도에 6.25 전쟁이 한창이던 때였습니다.

전쟁으로 생겨나는 수없이 많은 고아들을 지켜보면서
위더슨 선교사는
1910년부터 1923년까지
기존에 있던 보육원과 급식소 등
다양한 사회복지시설을 확장하고 관리하는 데 나섰습니다.

또 당시 어수선했던 한국 구세군을 재정비시켜
어려운 이웃들을 효과적으로 돌볼 수 있도록
인력을 구축했습니다.

성탄절에는 한국 구세군을 포함한 다른 외국 선교사들과 함께
자선냄비 모금에 나서며 고아사역을 알리는 등
열정을 쏟기도 했습니다.

[인터뷰: 이재성 사관 / 한국 구세군 역사]
: 한국전쟁으로 하루에도 수 없이 많은 고아들이 생겨났는데
그때 가장 먼저 나서서 고아사역에 뛰어들었던 것이 위더슨 선교사였습니다.
평생 고아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했었죠. 그녀는 자신만 고아 사역을 펼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더욱 고아들을 돌보는 일에 참여하길
진심으로 희망했어요. 고아들에게는 무엇보다 사랑과 관심이 제일 필요하니까요.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고아들을 사랑으로 돌보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온 위더슨 선교사.

1956년 57살에
갑작스런 위암 판정을 받고 임종을 앞둔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한국에서 주의 품으로 갈 수 있음에
크게 기뻐했습니다.

<자막>
‘나는 어린 양의 피로 구속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늘 기억하세요.
내가 죽는다고 서러워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세요.
오늘 나는 한국에서 하나님께로 가는 것을
무한한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열악한 조선에서 평생 고아들과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삶을 기쁘게 여겼던 한 사람의 헌신이
진정한 삶의 가치를 일깨워줍니다.

CGN투데이, 신소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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