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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특집, 구연영 선생과 전덕기 목사의 삶

1161등록 201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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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광복 71주년을 맞아
항일운동에 힘쓰며 나라사랑을 실천했던
크리스천들의 삶을 조명합니다.

오늘은 민족의 해방을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았던
‘구연영 선생’과 ‘전덕기 목사’의 삶을 돌아봤습니다.

보도에 신소라 기잡니다.

◀리포트▶
1864년 6월 서울에서 태어난 구연영 선생은
31세에 일본군에 의해 명성황후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항일운동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일본이 조선백성들의 민족정신을 말살시키기 위해
단발령을 내리자 구 선생은 이에 분개하며
항일운동의 의거지인 이천으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에서 경기도 연합의병부대인 ‘이천수창의소’의 중군장으로 활동하며
1,600명이 넘는 유생들과 함께 일본에 맞서 전투를 벌였습니다.

치열한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지만
강화된 일본군의 공격과
내부 분열로 의병들이 해산하게 되자
자신의 투쟁과 생각을 정리하고자
스스로 남대문에 위치한 상동교회를 찾아갑니다.
그 때 그의 나이 32세 이었습니다.

스크랜턴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접한 구연영 선생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신분제를 없애고자 노력했습니다.

[인터뷰: 김종설 사무국장 / 민족교회연구소]

40세에 정식 전도사가 된 후
아들인 구정서와 함께 이천에 있는 지역교회를 방문해 구국회를 조직한 후
친일파인 일진회의 만행을 규탄하며 국민들의 단결을 호소했습니다.

독립운동에 힘썼던 구연영 선생과
아들 구정서를 좋게 볼 리 없었던 일본군수비대의 총에 맞아
1907년 7월, 만인이 모인 앞에서 아들 구정서와 함께 눈을 감습니다.

구연영 선생의 뒤를 이어 항일운동에 나섰던 전덕기 목사.

일찍 부모를 여의고 숯장사를 하던 숙부 밑에서 자랐던 그는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의 헌신적인 전도 끝에
17세에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스크랜턴의 조수를 자청했던 전 목사는
1907년 감리교 목사안수를 받은 후
상동교회의 제6대 한국인 담임목사가 되어
활발한 목회활동을 펼쳤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을 위한 목회를 중시했던 그는
남대문 시장을 중심으로 노방전도에 힘쓰며
이들의 장례를 무료로 치러줬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기독 정신 아래
도산 안창호와 신민회를 만들어 항일운동을 전개합니다.

또 그를 믿고 따르던 김구와 주시경에게
독립운동의 아지트로 상동교회를 제공하고
만나는 항일운동가 마다 ‘박애와 평등, 자유 민주’를 가르치며
기독계몽정신을 갖도록 힘썼습니다.

[인터뷰: 김종설 사무국장 / 민족교회연구소]

그의 애국활동은 좀처럼 멈출 줄 몰랐지만
일본총독부의 방해에 점점 제약을 받게 됩니다.

1911년 조선총독부는 신민회가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는 사건을 조작해
전덕기 목사에게 심한 고문을 가했습니다.

온갖 고문 끝에 만신창이가 됐지만
석방된 후에도 민족 해방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조국을 위해 혼신은 다한 그는
1914년 고문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습니다.

그는 비록 해방을 보지 못한 채
39세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지만
상동교회의 젊은 청년들은
훗날 3.1운동을 주도하며 나라사랑을 이어갑니다.

총, 칼 앞에 굴하지 않고
옳은 길을 선택할 수 있었던
유연영 선생과 전덕기 목사

그들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과 사람 앞에 떳떳했던 삶이
광복절에 우리를 숙연하게 만듭니다.

CGN투데이, 신소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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