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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추산 김익상

588등록 2017-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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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한 몸 바쳤던 추산 김익상 선생.

최근 그의 공로를 인정한
전쟁기념관은 이달의 호국인물로 선정했는데요.

억압받는 민족을 대표해
구국운동을 펼쳤던 그의 삶을
신소라 기자가 조명했습니다.

◀리포트▶
의열단 출신으로 조선총독부 폭파와
상해 황포탄 의거를 결행한 독립운동가, 추산 김익상 선생.

그에 대한 연구가 교계 차원에서 활발히 진행된 건,
2002년, 감리교항일운동가연구회가 발족되면서 부텁니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학업을 이어가지 못할 만큼 형편이 어려웠지만
주변 크리스천들의 도움으로
평양 숭실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졸업 후 기독 학교 교사로 잠시 일했던 것으로 전해지지만
그는 결국 가정 사정으로 철공소 견습공으로 취직해
서울의 광성연초공사에서 일하게 됩니다.

1921년 중국으로 발령이 난 그는
우연히 북경에서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의 연설을 들은 후
자신도 항일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해
독립운동가로서 살 것을 다짐했습니다.

크리스천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의열단에서 활동했던 김익상 선생은

일제 식민통치의 심장부인 조선총독부 폭파 계획을 이루기 위해
김원봉 의사로부터 폭탄 2개와 권총 2정을 건네받고
1921년 9월 12일 조선총독부로 향했습니다.

거사를 위해 일본 전기 수리공 차림으로
조선총독부 청사로 간 그는
갖고 있던 폭탄을 던진 후 유유히 청사 안을 빠져나왔습니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억압과 착취에 힘들어했던 한민족은
일제히 큰 자극을 받아 독립을 열망하게 됐고

한동안 조선 인들에겐
김익상이라는 이름 석 자가 각인됐습니다.

[인터뷰: 민관기 목사 / 감리교항일운동가연구회]
“(그 당시) 조선 총독부가 최고의 정부기관이었는데
그곳에 폭탄을 던졌다는 것은 정말 작은 일이 아닙니다.
(김익상 선생은) 왜적들을 향한 테러, 당사자들만 처단한다는 원칙이
가슴 속에 있었습니다.”

의거 후에도 일제가 반성할 기미를 안보이자
제2차 투쟁을 준비한 김익상 선생은
의열단 동료인 오성륜과 함께
상해로 올 예정인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처단하기로 계획했습니다.

하지만 오발로 계획은 실패로 끝났고
현장에서 잡힌 김익상 선생은
공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이후 사형이 확정됐다 다시 무기징역에서
20년 징역으로 감형돼 오랜 옥고를 치루면서도
그때마다 의연함을 잃지 않고 구국운동의 정당성을 밝혔습니다.

[인터뷰: 민관기 목사 / 감리교항일운동가연구회]
“모든 민족을 자기의 자식으로 삼은 거죠.
그러니까 자신을 그렇게 버릴 수 있었던 거죠.
뻔히 죽을 것을 알면서 잡힐 것을 알면서
민족의 아비의 마음이 아니면 그러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석방 후 미행하던 일본인 경찰에게 다시 연행된 뒤
그의 행적은 지금까지도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28세 젊은 나이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바친 그의 정신과 희생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궈낸
귀한 밑거름이 되고 있습니다.

CGN투데이, 신소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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