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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특집 - ‘3.1운동과 기독교 학교’

1022등록 2019-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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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멘트▶

CGN투데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 주간 '3.1운동과 한국교회'를 전해드립니다.

첫 번째 순서로
'3.1운동과 기독교 학교'를 소개합니다.

임성근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200만 국민이 일제히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지역마다 세워진 832개의
기독교 학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 기독교 학교, 하나의 선교 틀로 자리 잡아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들은
천주교가 종교적인 이유로 100년간
박해받은 사실 때문에
처음부터 복음전도나 교회 설립에 대해 주의하고
정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복음전도를 직접적으로 할 수 없었던 선교사들은
병원과 학교를 세워 간접적으로 복음을 전했는데
이를 통한 의료와 교육 사역은
한국에 복음을 전하는데 좋은 도구가 됐습니다.

점차 사람들은 선교사의 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이런 간접 선교의 결과로
선교사들은 2년 만에 교회를 세울 수 있게 됐습니다.

[녹취] 이덕주 교수 / 감리교신학대학교
“전라남도부터 함경도에 이르기까지 주요 거점 도시에는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전국을 6개의 선교부가 지역분할을 하고 각각 주요 거점 도시에는 선교부를 개설했습니다. 그 안에 병원과 학교와 교회를 설립해서 그것이 전국으로 확산됐습니다.”

이후에 선교사들이 가는 곳마다
선교부가 세워지고 선교부 산하에
병원과 학교 그리고 교회가 세워지면서
의료와 교육, 복음전도 사역이 함께 전개되는
'삼각 선교'의 기본 틀이 형성됐습니다.

이런 선교의 기본 방식은 서울뿐 아니라
이북과 지방에서도 그대로 적용됐습니다.

이같이 전국의 기독교 학교들은
하나의 네트워크로 형성되며
3.1운동의 진원지와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2. 만세시위를 이끌어간 기독교 학교들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된 전국의 기독교 학교들은
각각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며 3.1운동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우선 서울지역을 살펴보면
대표적으로 경신, 배재, 이화 학당이 있습니다.

경신학교는
민족대표들과 함께 학생들의 집결 방안을
모색하는데 힘을 모았습니다.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파리강화회의에
참여한 김규식 선생을 비롯해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외친 정재용 등
100여 명의 전교생들과 졸업생들이 3.1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결국 조선총독부는 경신학교를
‘혁명자 양성소’로 낙인찍어
1920년까지 학교에서
수업 및 신입생 입학을 불허했습니다.

배재학당은 민족대표 이필주 목사를 통해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와 자료를
보다 일찍 얻을 수 있었습니다.

또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이었던 박동완 전도사와
배재학당 교사 김진호 전도사의 지시를 받은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각국
공·영사관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화학당과 정신여학교 등
여자학교도 3.1운동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이화학당 학생인
유관순, 서명학, 김복순, 김희자, 국현숙이
구성한 ‘5인 결사대’는
이화학당 기숙사 뒷담을 넘어
남대문으로 달려가 만세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정신여학교 학생들은
고종황제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기숙사 70여 명의 학생들이
검은 댕기에 상복을 입고 일본에 항거했고

그 후 3월 5일 군중들과 함께 만세를 외치다가
60여 명의 학생들이 끌려갔습니다.

이북지역에서도 기독교 학교들의 역할은 컸습니다.

평양은 남강 이승훈 선생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3.1운동을 펼치게 한
중심 지역이었습니다.

숭실학교는 김건, 노원찬, 박병곤, 윤원삼 등을 중심으로
수백 개의 태극기가 제작돼 평양시민에게 공급됐고
대형 태극기를 제작해 게양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또 서울에서 보내온 독립선언서를
학교 외쇄부에서 3000장 이상 인쇄해
평양시민들에게 배포했고,

숭실학교의 학생 고적대는
3.1 만세 시위의 행렬 앞에 서서
찬송가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를 연주하며
평양의 3.1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녹취] 이덕주 교수 / 감리교신학대학교
“기독교 학교의 모습을 보면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태극기와 십자가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나라사랑으로 연결되는 대목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전국의 흩어져있는 기독교 학교들은 기독교 복음을 바탕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애국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그런 모습으로 이어졌습니다.”

3. 3.1운동에 앞장 선 기독교학교들

1919년 9월 장로회 총회가 발표한
6개월간 장로교회의 피해 상황은
체포된 기독교 학교의 교사 및
기관의 지도자가 202명이며
파괴된 학교만 8개라고 기록됐습니다.

또 사살된 사람이 41명,
매 맞아 죽은 사람이 6명,
체포된 성도가 3,804명이고
그중에서 목사와 장로가 134명이었습니다.

이같이 기독교 학생들이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동인으로
장로회신학대학교 박상진 교수는
기독교 학교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박 교수는 기독교 학교의
건학 이념과 신앙교육, 교과교육 등이
기독교 학생들을 독립운동에 참여시킨 요인으로 보고

국어시간에는 성경을 지문으로 하고
음악시간에는 찬송가를 배우는 등
신앙과 교과가 분리되지 않은 통합된 교육과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헌신된 삶을 사는 교사를
만났기 때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녹취] 박상진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그 당시에는 예배나 성경 교과만이 아니라 모든 교과목이 신앙으로 축축하게 적셔져있었습니다. 기독교 학교의 선생님들은 삶이 교육이었습니다. 헌신된 삶을 살아오신 그 선생님을 만난 아이들의 마음속에 꿈틀거림이 일어난 것입니다.”

100년이 지난 지금
한국에서는 기독교 학교에서
종교 수업을 할 수 없는 등

기독교 정신의 건학 이념에 따라
교육을 할 수 없는 현실에 처해있어

3.1운동에 끼친 기독교 학교들의 공헌을 되새기고
기독교 학교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인터뷰] 함승수 교수 / 숭실대학교
“기독교 학교인가 스스로 자문하고 우리 안에 과연 무엇을 추구하는 학교였는지 냉정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그 당시에 선생님과 학생들이 의를 위해서 일어난 것처럼 이 사회를 위한 하나님의 교육을 꿈꾸는 기독교 학교가 될 수 있도록 자성적인 노력이 가장 필요합니다.”

삶과 신앙의 일치로
독립운동에 헌신한 기독교 학교 학생들,
오늘날 우리에게 역사적 교훈과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CGN투데이 임성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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