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멘트▶ CGN투데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3.1운동과 한국교회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고있는데요.
100주년을 맞는 오늘, 당시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어떤 역할을 감당했는지 알아봤습니다.
박건희기자입니다.
◀리포트▶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초석이 된 3.1만세 운동은
1919년 3월 1일 전국 9곳에서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당시 조선 인구는 약 천8백만 명에서 2천만여 명으로,
이 중 기독교인 비율은 약 1퍼센트에서 1.5퍼센트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3.1운동으로 수감된 사람들 중 기독교인의 비율은 약 25퍼센트에서 많게는 30퍼센트로,
여성 수감자들의 경우 약 60퍼센트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대한민국 독립은 민족대표 33인 외에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함께했기에 가능했습니다.
[인터뷰] 황미숙 연구원 / 한반도통일역사문화연구소 광성학교 학생이었던 장지림 이라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10대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신앙적 입장에서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다가 체포되서 심한 고문을 받고 병보석 직후 사망합니다. 이런 교인들이 장지림뿐만 아니라 많이 있었습니다.
[C.G] 3.1운동이 일어난 9곳 중 현재 남한 지역에 해당되는 곳은 서울과 경기도 고양시입니다.
나머지 7곳인 평양, 의주, 선천 등은 현재 북한 지역입니다.
해방 이전 북쪽에 위치한 교회는 약 3천여 개로, 3.1운동의 큰 원동력이 됐습니다.
당시 평양에 위치한 평양신학교를 통해 배출된 많은 신학생들이 북쪽 지역에 교회를 개척했기 때문입니다.
평안북도의 신천읍교회와 의주읍교회, 평안남도의 장대현 교회 등이 3.1운동에 앞장섰습니다.
또,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이후 교인이 많아진 것도
북쪽 지역에서 3.1운동이 많이 일어난 원동력이 됐습니다.
[인터뷰] 이순자 책임연구원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민족대표) 33인이 마치 3.1운동을 다 만든 것처럼 잘못 이해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그 민족대표 33인이 만든 독립선언서를 자기 고향마을에 가지고 내려가서 각 지역에서 만세 시위를 일으켰었던 사람들은 일반인들이었고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먼저 나서서 3.1운동에 참여한 것도 일반 성도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민족대표 33인 중에는 의주 서교회의 유여대 목사, 선천 북부교회의 양전백 목사 등 목회자들도 있었습니다.
기독교와 천주교의 연합 운동을 이끈 고 남강 이승훈 선생은 장로교단의 장로였습니다.
이 외에도 항일 비밀 결사단체 신민회의 리더들과 105인 사건 등으로 투옥된 인사들 중에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인터뷰] 황미숙 연구원 / 한반도통일역사문화연구소 평안남도 강서군 반성면에 사천시장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여기서 만세 운동이 일어나는데 조진탁 장로가 이끌었습니다. 이 만세운동은 유관순 열사가 일으켰던 경천 만세 운동 이상으로 활발히 전개됐던 만세운동이고 탄압고 매우 심했습니다.
3.1운동은 교회 조직을 통해서 확산됐습니다.
당시 존재하던 장로교의 총회와 노회 조직, 감리교의 연회와 지방회 조직을 통해
3.1운동 준비와 소식 등이 지방으로까지 빠르게 확산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정교분리의 원칙을 가진 선교사들은 시위에 직접 참여하진 않았지만,
부상자들을 돌보거나 3.1운동을 해외에 알리는 등 간접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또,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나 병원 등이 독립운동 준비를 위한 장소를 제공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인터뷰] 황미숙 연구원 / 한반도통일역사문화연구소 3.1운동 직후에 체포되거나 투옥된 인사들 중 절대다수가 지도자급보다는 일반 성도들이 많았거든요. (3.1운동이) 한국 교회에 주는 의미를 생각해본다면 그냥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하고 희생했던 신앙 정신을 이어가는 것이 바람직한 한국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
3.1운동 100주년, 기념비적인 숫자를 넘어 대한민국을 일궈낸 선조들의 신앙을 마음 판에 새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