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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어디까지 알고 계시나요?

845등록 2019-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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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멘트▶

오늘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순국선열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는 행사가
전국 곳곳에서 열리는데요.

3.1절 어디까지 알고 계시나요?

3.1운동엔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또 기독교는 어떤 역할을 했는지.

임성근 기자가 정리했습니다.

◀리포트▶

1919년 3월 1일
일본의 침략에 항거해
조선 전국의 거리에서
대한독립 만세가 울려 퍼진 지 100년.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949년 국경일로 제정되고
7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3.1절에 대해 잘못 알고 있거나
미처 모르고 있는 사실들이 있습니다.

1. 1919년 만세운동의 본래 계획 일은 3월 1일이 아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 황제가 서거하고
의문스러운 서거 소식이 전해진 다음날,
수많은 백성들이 덕수궁 대한문 앞으로 몰려와
통곡했습니다.

황제를 일본인들이 독살했다는 소문이
전국으로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이는 독립만세 운동의 기폭제가 됐습니다.

민족대표 33인은
고종 황제의 국장일인 3월 3일에 맞춰
독립선언을 하는 계획을 세웠지만

고종황제의 서거로 비참함을 느끼는 백성이
울분을 참지 못해 자칫 폭력시위가 일어날 것을 염려해
독립선언을 3월 2일로 앞당기도록 논의를 했지만

3월 2일이 주일이어서 기독교인들의 참여가 어려워
결국 가장 빠른 날짜인 3월 1일로 정하게 됐습니다.

[인터뷰] 함승수 교수 / 숭실대학교
“만세운동의 본래 계획은 3월 3일이었습니다. 고종황제의 인산일이었는데요. 천도교에서 많은 백성들이 슬퍼하는데 (독립운동을 하면) 자칫 백성들이 흥분할 수 있겠다 해서 3월 2일로 바뀝니다. 그런데 3월 2일은 주일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반대하게 되고요 그래서 결국은 가장 가까운 날짜인 3월 1일 토요일에 만세시위가 결정되게 됩니다.”

2. 3월 1일 선포된 기미독립선언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선언서가 아니다!

대부분 3월 1일 만세운동이
일어날 때 낭독했던 독립선언서가
최초의 선언서라고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최초의 독립선언서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2.8 독립선언서로

일본 도쿄 유학생 모임 학우회가 중심이 돼
2월 8일 도쿄 조선기독청년회관에
유학생 400여 명이 모여
조선청년독립단 명의로
‘2.8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습니다.

독립선언식의 주도적 인사들의
대부분이 기독교 신자들이었고
2.8독립 선언 실무를 담당했던
조선기독교청년회 총무 백남훈
역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인터뷰] 함승수 교수 / 숭실대학교
“대표적으로 2.8 독립선언서가 있었는데요, 일본 유학생들이 먼저 동경에 모여서 조국의 독립과 일본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고 우리 민족이 독립돼야 된다는 것을 먼저 선포했던 일들이 있습니다. 2.8독립 선언서가 기초가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2.8 독립선언서를 한국으로 옮기는데
정신여학교 출신으로 깊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김마리아의 역할이 컸습니다.

김마리아는 2.8독립 선언서를
국내로 전달하는 임무를 맡고

일본 헌병으로부터
사상이 불온한 여자로 낙인찍혀 있었기 때문에
줄곧 감시 대상으로 주목받고 있었음에도

기모노를 입고 일본 여자로 변장해
의복의 허리띠 속에다
복사한 선언서를 감추고
2월 15일 부산항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렇듯 해외에서 울린 2·8독립 선언 소식은
조선총독부의 무단통치에 크게 신음하던
국내 지식인, 학생,
무엇보다 종교인들에게 큰 자극이 됐습니다.

3.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외친 사람은 민족대표 33인이 아니다!

1919년 2월 28일
서울지역에서만 2만 장에 달하는
독립선언서가 인쇄됐습니다.

그리고 1919년 3월 1일 새벽
독립선언식을 예고하는 안내문이 집집마다 뿌려졌고
시내 주요한 곳에는 벽보가 붙었으며
조선독립신문 창간호가
독립선언서와 함께 배달됐습니다.

일본 군경들이 독립선언을
교란시킬 것을 경계한 민족대표들은
긴급히 독립선언서 낭독 장소를
탑골공원에서 서울 인사동 태화관으로 변경하고
독립선언을 낭독한 뒤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이후 민족 대표들은 자진해서
경찰에 신고하고 연행됐습니다.

3월 1일 독립선언식의 소식을 들은
수만 명의 백성들은 탑골공원으로 모였지만

백성들은 독립선언식의 장소가
태화관으로 급히 변경된 것을 모르고
민족대표들을 기다리던 중
한 학생이 팔각정 위에 섰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읽었는데
그것이 독립선언서였습니다.

기독교 학교인 경신중학교 출신 정재용이었습니다.

[인터뷰] 함승수 교수 / 숭실대학교
“민족대표들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외치기로 했으나 자칫 민중들이 소요가 일어날 것을 염려해서 태화관으로 장소를 바꿨고요. 백성들은 그걸 모르고 기다리고 있다가 경신중학교 출신인 정재용이 일어나서 독립선언서를 외치게 됩니다.”

4. 3.1운동은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계가 중심이 된 자발적 독립운동이다!

독립운동 단체 신한청년단은
국내의 독립 시위 준비를 위해
1919년 2월 평양으로 선우혁을 보냈습니다.

선우혁은 남강 이승훈의 도움을 받아
1919년 2월 9일 평양지역 기독교 지도자인
길선주 목사와 양전백 목사를 만나 시위 계획을 나누고,
평양에서 만세시위를 진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또 평양과 서울에서 동시에
독립 시위가 일어날 수 있도록
이승훈은 사람을 보내
서울의 기독청년단을 움직이게 됩니다.

기독청년단에 소속되어 있던
보성전문학교 학생들을 통해
기독교에서 준비하는 독립 시위의 소식이
천도교에 전해지게 됐고,

1919년 2월 12일
기독교의 이승훈과 천도교의 송진우가 만나
개별적으로 독립 시위를 준비하던
기독교와 천도교가 연합하기로 합의했고

이후 불교가 참여해
기독교-천도교-불교가 함께하는
독립운동으로 확장하게 된 것입니다.

[인터뷰] 함승수 교수 / 숭실대학교
“3.1운동은 종교계 지도자들이 모여서 자발적으로 움직였다는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천도교 기독교가 중심이 됐고 불교가 함께해서 범종교들이 한마음으로 독립을 위해 마음을 모았던 뜻깊은 모임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3.1운동 당시 기독교 인구는
전체 인구의 1.5%,
20만 명 정도에 불과했지만

피해 입은 사람들의 3분의 2가 기독교인이었던 것만큼
기독교는 3.1운동에 헌신적이고 앞장섰습니다.

오늘만큼은 기독교 정신으로
구국과 애국을 삶으로 실천했던
우리들의 선조들을
묵상하며 기려보는 것은 어떨까요?

CGN 투데이 임성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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