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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은 하나”

697등록 2019-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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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멘트▶

3.1 운동을 주도하고
평생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손정도 목사.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손 목사의 신앙과 삶을 조명하는
한국교회사 포럼이 열렸습니다.

신효선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1882년 평안북도 강서에서 태어나
숭실중학교를 다니며 평양대부흥을 체험한 손정도 목사.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선교사로 파송됐으나
선교사역을 이유로 일제에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하는 데에
다른 기독교 지도자들과 함께 주축이 되었으며

임시정부 의정원의 의장으로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 선포했습니다.

[녹취 : 임희국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역사신학]
손정도 목사님과 이광수가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일정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면서 입법기관인 ‘임시의정원’ 구성을 제의합니다.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날 이동녕이 돌연히 의장직을 사임했습니다. 그 후임으로 손정도 목사가 의장이 되었습니다.

손정도 목사의 삶은
민족해방운동가로서뿐만 아니라
부흥을 이끌어낸 목회자로서,
만주 지역에서 사역했던 선교사로서도
조명돼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됐습니다.

독립운동가로서의 역할이 강조된 나머지
목회자와 선교사로서의 업적이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손정도 목사는
선교지 뿐 아니라 전라남도 진도 유배지에서도
수많은 결신자를 세웠습니다.

[녹취 : 이상규 석좌교수 / 백석대학교 한국교회사]
1907년 이래로 존속해 오던 내지선교회의 회칙을 개정하여 1909년 내외국선교회로 개칭했다. 이 내외국선교회에 의해 파송된 첫 선교사가 손정도 목사였다. 따라서 그는 한국교회 초기 해외 선교사이자 감리교회의 첫 해외 선교였다. 그가 개척 선교사를 자원한 것은 복음에의 열정과 선교에 대한 확신을 보여준다.

이덕주 박사는
손정도 목사가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이
함께 어우러진 삶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진도 유배 후 땅끝이라 여긴 중국으로 다시 선교를 나가려 했지만
조선총독부에 의해 좌절되고
결국 국내에 남아 동대문교회와 정동제일교회에서
목회의 열정을 이어가게 됩니다.

[녹취 : 이덕주 박사 / 前 감리교신학대학교 교회사 교수]
그 시대 젊은 청년들에게 손정도 목사님의 민족주의적 메시지는 청년들의 개종을 불러일으켰던 것이죠. 이분의 메시지는 단순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제대로 믿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 그것이 곧 나라를 되찾는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이 구국의 방편인 것을 강단에서 외쳤던 것이고 그것이 젊은 청년들을 교회로 오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고문 후유증으로 49세의 나이에 순교할 때까지
일본 전향을 끝까지 거절하고
하나님과 나라 사랑을 실천한 손정도 목사의 삶이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한국 사회와 성도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CGN 투데이 신효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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