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움을 겪고 있는 뉴올리언즈 지역에 이보다 더 밝은 주일의 일출은 없을 것입니다. 교인들이 오전 7시30분 예배를 위해 프랭클린애비뉴침례교회에 도착하고 있습니다.
프레드 루터 주니어 총회장 / 남침례교
“수 마일을 운전해서 교회에 도착하지만 성소에 자리가 없어 다른 공간으로 옮겨가야 하는 성도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무겁습니다. 제게는 참 힘든 일이에요.”
루터 목사는 5,000명 이상의 성도들을 위해 주일마다 세 번의 예배를 엽니다. 1986년, 루터 일가가 처음 도착했을 당시 교회의 성도는 65명에 불과했습니다. 도시 사회가 백인 중심에서 흑인 중심으로 변함에 따라 교회는 쇠퇴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남침례교선교회 회장은 루터 목사가 이 같은 상황을 바꿀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프레드 루터 주니어
“그분이 제게 말했어요. ‘이 교회를 위해 자네를 선택한 것은 내가 아니라네. 하지만 이 사람들은 분명히 자네를 원해 이것이 내가 자네에게 해줄 수 있는 설명이라네. 교회를 살리지 못한다면 교회는 매장될거야.’ 제가 그분을 바라보며 대답했죠. ‘뉴올리언즈가 재즈 장례식으로 유명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장례식을 치르고 싶지는 않아요. 반드시 이 교회를 부활시킬 겁니다.’”
수그러들지 않는 그의 믿음과 열정은 남침례교 사상 첫 번째 흑인 수장이라는 역사를 쓰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프레드 루터 주니어 총회장 / 남침례교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서면 그때부터 저는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위대하고 위대한 우리 선조와 저 이전의 믿음의 선구자들은 과연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고 말이죠.”
노예의 후손인 루터는 단체가 시작되던 167년 전, 노예제도와 인종차별을 지지했던 조직을 이끕니다.
프레드 루터 주니어 총회장 / 남침례교
“몇 년 전 한 권투 기획자가 말했던 것처럼 미국은 별난 나라이니까요!”
루터는 미래를 바라봅니다. 그의 최고 우선순위는 남침례교의 성장입니다. 여전히 미국에서 가장 큰 복음주의 교파로 자리매김하고 있지만 신도의 수는 5년째 감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혼자서는 이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프레드 루터 주니어 총회장 / 남침례교
“제게는 2년의 기회가 있습니다. 하고 싶을 일을 모두 하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에요. 하지만 감소 추세를 꾸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지금의 이 자리에서 나라와 교회에 영향을 주는 방법을 사람들이 찾아내 감당해내도록 도울 수 있을까요?”
루터는 회복에 관한 중요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는 프랭클린애비뉴 교회가 두 번이나 부흥했다고 증언합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강타로 9피트가 넘는 물에 교회가 잠겼을 때 교인들은 도시를 떠났습니다. 다시 문을 열기까지 2년이 걸렸습니다.
프레드 루터 주니어 총회장 / 남침례교
“그날은 결코 잊을 수가 없어요, 하박국을 본문으로 설교했었죠. 설교 제목이 '재앙에서 춤으로'였어요. 말 그대로 강단을 오가며 춤을 췄어요.”
지금 이 사진처럼 말이군요.
프레드 루터 주니어
“네 맞아요. 강단을 오가며 춤을 췄죠.”
그의 춤은 교회로 돌아오게 된 것 이상을 축하하는 것이었습니다. 루터와 교인들은 지역의 파괴된 30여 가구를 복구하는 데에 도움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공적으로 루터는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잊지 못할 점심 식사를 함께하게 됩니다.
프레드 루터 주니어 총회장 / 남침례교
“제가 호두파이를 먹을 때였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디저트죠. 그때 문득 대통령이 저를 계속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어요. ‘맛이 끝내주는데!’하며 먹고 있었거든요. 그랬더니 ‘그렇게 맛있어요?’라고 물어보더군요. 그랬더니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포크를 들고 저한테 묻지도 않고 제 파이를 그냥 가져가는 거예요. ‘맛 좀 봅시다’하면서 말이에요. 세상에! 믿을 수가 없었죠 하지만 어떻게 하겠어요? 비밀정보부가 사방에 있는데 안된다고 할 수도 없잖아요. 아무튼 결코 잊을 수 없는 점심이었죠.”
루터의 성격은 대통령에서부터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까지 모두를 포용합니다.
프레드 칩 루터 3세 / 목사
“저는 절대로 크리스피 크림 직원은 아니에요. 아버지는 크리스피 크림 도넛을 정말 좋아하세요. 아버지가 크리스피 크림 도넛을 잘라 드시는 것을 늘 봐 왔어요.”
그의 도넛 사랑과 함께 루터의 겸손은 판박이와 같은 아들 칩이 가장 존경하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프레드 칩 루터 3세 / 목사
“아버지는 결코 전문가가 되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지 않아요. 아버지는 겸손한 분이세요. 그저 모든 일에 항상 최선을 다하실 뿐이에요.”
그의 교회 성도는 수천에 달하지만 루터는 성도들과 악수하기 위해 강단에서 내려가 회중석으로 갑니다. 또한, 그는 모든 메일을 직접 읽고 일일이 답장을 보냅니다. 가족과 친척과 동료와 이웃들이 함께 교류하며 교회를 성장시켜 나가는 ‘FRANGELISM’사역의 일부입니다. 페이스북을 안 하시는군요!
프레드 루터 주니어 총회장 / 남침례교
"저는 페이스북을 안 해요. ‘트위터’와 ‘트위팅’의 차이가 뭔지도 모르는걸요. 몰라요. 정말 모르겠어요.”
남침례교 총회장에 선출된 직후 프레드 루터의 이름은 트위터에서 최고의 화제어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트위터를 통해 축하 글을 남겼고 ‘지금의 한정된 사역 방법으로 아이팟 세대에 접근할 수 없다’는 루터의 말이 트위터에 인용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뉴올리언즈 로어 나인스워드의 길모퉁이에서 사역을 시작했던 한 목사에게는 상당히 색다른 영역으로 보입니다.
프레드 루터 주니어 총회장 / 남침례교
"요즘 저를 만나는 사람들이 그래요. ‘당신이 저기 길모퉁이에 있었을 때가 기억나요. 솔직히 거의 미친 사람 같았어요’ 아시다시피, 거리의 설교자들은 어려움이 많거든요. 어떤 사람들은 손을 흔들어 주지만 어떤 사람들은 욕을 하죠. 어떤 이들은 저주를 퍼붓기도 해요. 하지만 그것이 제 사역의 시작이었어요. 생각하면 당시 길거리 사역이 지금의 사역을 위한 중요한 훈련의 기회였던 것 같아요."
한 거리의 전도자가 이제는 4,500개 이상의 교회와 1,600만 성도에 이르는 미국의 최대 교단을 이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