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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리포트

48시간의 크리스마스

834등록 2016-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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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914년 벨기에로 돌아가 보려고 합니다. 세계 1차 대전이라는 격렬한 충돌을 크리스마스 정신으로 극복한 날이었습니다. 43km가량 뻗어있던 서부 전선의 적들이 48시간 동안 친구가 됐습니다. 존 제섭이 전해 드립니다.

앤드류 해밀턴은 그가 사는 작은 마을에 세워진 1차 대전 기념물 앞에 매년 화환을 가져다 둡니다. 잘 알지 못했지만 그의 할아버지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그분에 대해 어떻게 기억하십니까?

앤드류 해밀턴
"고함을 많이 치던 노인이었어요. 귀가 들리지 않았거든요. 세계 1차 대전 때, 청력을 잃었어요. 그래서 좀 무서웠어요. 그러다가 그분의 일기를 읽었고 그가 겪었던 삶에 놀라웠습니다. 이것이 원본입니다. 앞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거죠."

해밀턴이 쓴 책 에서 그의 할아버지인 로버트 해밀턴 대위가 1913년부터 1950년까지 일기를 썼다고 밝혔습니다. 대부분 일상적인 내용이었지만 주목할 만한 예외가 있었습니다. 1914년이었습니다.

앤드류 해밀턴
"8월 5일 수요일입니다. '오전 5시 30분에 동원'"

해밀턴 대위는 세계 1차 대전 초기에 합류한 영국 군대의 일원이었습니다. 당시 내려진 합의는 크리스마스 쯤에는 전쟁을 끝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보다 하루 전, 독일군이 벨기에를 침략했고 영국군이 참전했습니다. 얄궂게도 양측은 사촌 지간이었습니다.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2세 황제와 조지 5세 왕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벨기에라는 작은 나라가 끼었습니다.

피에트 치에렌스 / 플랑드르 필드 박물관
"벨기에의 시골에 세계의 이목이 쏠렸습니다. 마을 노인들에게 전쟁 이야기를 듣고 자랐습니다."

독일군은 벨기에에서 프랑스까지 파괴의 흔적을 남기며 길을 텄습니다. 연합군이 파리 외곽에서 독일군을 저지하고, 밀어냈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뿐이었습니다. 교착 상태가 뒤따랐고, 양측은 구덩이를 팠습니다. 서부 전선에서 참호전이 시작됐습니다.

앤드류 해밀턴
"9월 18일, 포격으로 참호 속에 있던 사람들 몇몇이 죽거나 다쳤다. 예외 없이 이곳에서 보낸 가장 비참한 밤이었다. 발목까지 물이 차는 곳에서 밤새 서 있었다. 비가 계속 내렸다."

이곳은 백여 년 전에 만들어진 참호 중의 하나입니다. 독일군과 연합군이 판 두 줄의 구덩이가 지그재그 형태로 나란히 뻗어있습니다. 길이는 724km가량 됩니다. 일부 구간은 양군의 참호가 45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피에트 치에렌스 / 플랑드르 필드 박물관
"양측은 구덩이를 팠고, 추위가 오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적은 중간 지대 반대편에 있는 상대가 아니라 추위였습니다."

11월 말 무렵이 되자 서부 전선에서 150만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교착 상태가 계속되면서 크리스마스까지 전쟁이 끝나지 않을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서부 전선 밖에서는 공식적인 크리스마스 휴전을 요구했습니다. 교황 베네딕트 4세도 '천사들이 노래하는 밤에는 무기가 잠잠하기를 바란다'며 휴전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영국군의 호레이스 스미스 도리엔 장군은 친목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면서 '모든 계급의 공격 정신을 죽인다'고 말했습니다.

앤드류 해밀턴
"12월 24일, 참호로 들어갔다. 크리스마스를 그 안에서 보내야 한다니 좀 실망스러웠다."

아티스트인 브루스 베언스파더는 해밀턴 대위의 로얄 워릭셔 연대의 기관총 사수였습니다. 그는 라는 책에서 전쟁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브루스 베언스파더
"당시에 나의 운이 다한 것 같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크리스마스 축제의 모든 것이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군은 전쟁이 축제를 막지 못하게 했습니다. 독일군은 참호에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했고 12월 23일에는 폭격당한 설탕 정제소에서 예배를 열었습니다. 교사인 쿠르트 체미쉬는 작센군 134 연대에서 복무했습니다. 해밀턴 대위처럼, 그도 전쟁 중에 일기를 썼습니다.

쿠르트 체미쉬
"우리는 <이 날은 주가 지으신 날> 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많은 사람이 감동해 눈물을 흘렸다."

피에트 치에렌스 / 플랑드르 필드 박물관
"당시에는 프랑스나 벨기에 등의 앵글로 색슨 문화보다 독일에서 크리스마스를 더 중요한 제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쿠르트 체미쉬
"크리스마스 이브와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피할 수만 있다면 우리 측에서는 총을 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쿠르트 체미쉬
"참호에 들어가자마자 우리는 (그리고 영국군은) 서로의 관심을 끌고자 했다."

브루스 베언스파더
"크리스마스 정신이 우리 모두에게 퍼졌다. 우리는 다음날인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해서든 다르게 보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모색했다."

쿠르트 체미쉬
"한 영국군이 참호 너머 우리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그리고 행복한 새해가 되기를 바란다'고 외쳤다. 나는 그와 그의 동료들에게 '정말 고맙다, 당신들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다."

브루스 베언스파더
"몇 달에 걸친 보복성 저격과 포격 끝에 이 작은 에피소드가 활기를 북돋웠다. 적의만이 이어지는 나날의 단조로움에 반가운 위안이었다. 크리스마스 아침에 아주 일찍 일어났다. 완벽한 날이었다. 아름다운 구름 한 점 없는 날이었다."

앤드류 해밀턴
"12월 25일, 세계 역사에 남을 특별한 날이었다. 독일군 장교를 만났다. 우리는 48시간의 지역 협정을 맺었다. 내가 아는 한, 우리의 이 노력은 참호를 따라 뻗어나가 우리가 들리는 곳까지 퍼졌다. 크리스마스였고, 해밀턴 대위 휘하에 있던 군인들은 끔찍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요. 그리고 할아버지는 신실한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그 일이 일어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쿠르트 체미쉬
"크리스마스 축제, 사랑의 축제를 시작하자 잠시나마 적들이 친구가 됐다."

브루스 베언스파더
"그들이 있었다. 실제, 현실의 독일군이었다. 양측에 증오는 전혀 없었다."

서부 전선 대부분 지역에서 전쟁은 재개됐지만 43km가량의 영국군 지역에서는 비승인 휴전이 이루어졌습니다. 양군은 사망자를 땅에 묻도록 도왔습니다. 음식이나 담배, 단추를 선물로 교환했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중간 지대에서 축구를 하기도 했습니다.

피에트 치에렌스 / 플랑드르 필드 박물관
"이 일은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었습니다. 다시 사람이 된 것 같았습니다. 전쟁 무기가 그들을 총알받이나 살인 기계가 되게 만들었으니까요."

쿠르트 체미쉬
"아름답지만 기이한 일이었다. 이 크리스마스를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브루스 베언스파더
"이 작은 사건 가운데 내가 마지막으로 목격한 것은 사회에서는 아마추어 미용사였던 우리 연대의 기관총 사수가 유순한 독일군의 부자연스럽게 긴 머리를 잘라주는 장면이었다."

앤드류 해밀턴
"정말 즐거웠고, 가장 놀라운 크리스마스였다. 하지만 자정이 지나고 보초를 두 배로 늘렸다."

전쟁이 끝나기까지 세 번의 크리스마스가 더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서 코난 도일은 참혹함으로 얼룩진 전쟁의 기억 가운데 단 하나의 인간적인 사건이었다고 묘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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