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영상 소개
▶앵커멘트◀
분열과 다툼, 이단들의 교회 침투 등으로
혼란스러운 이 시대에
든든한 기둥이 되어줄 신앙의 선배가
그 어느 때 보다 절실한데요,
소외된 이웃을 품고
자신의 목숨을 주기까지
한국을 사랑했던 외국인들이 있습니다.
서서평 선교사와 윤학자 여사,
두 신앙의 선배를
주영희 아나운서가 소개합니다.
▶내레이션◀
100여 년 전 질병과 고통에 시달렸던 한국인들을 위해
가진 것을 다 내어주느라
정작 자신은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숨을 거둔 외국인 여성 두 명이 있습니다.
서서평 선교사와
윤학자 여사가 그 주인공인데요.
서서평 선교사는 1880년 엘리자벳 쉐핑이란 이름으로
독일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일찍이 여의고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녀는
예수님을 본받으라는 할머니의 생전 말씀에
간호 선교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당시엔 준비된 에이스 선교사들을 1순위로
해외로 파송하던 시대였는데요.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낯선 조선 땅에 와
천천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모난 성격을 평평하게 하자는 뜻이 담긴
서서평이란 이름으로 살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간호사가 돼 나병 환자를 돌보고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학교를 세웠습니다.
당시 그녀의 양녀가 된 사람만 열세 명.
평생 이웃을 섬기고 아낌없이 베풀었던 그녀는
가진 전 재산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 제중원에 기부하고
1934년 54살에 영양실조로 생애를 마쳤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가는 길.
많은 이들이 어머니를 부르며 목 놓아 울었습니다.
하나뿐인 담요도 당장 먹을 쌀밥도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진정 마음이 부유했던 사람.
지금은 세상에 없지만
그녀의 향기는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있습니다.
한국을 사랑한 또 한명의 여인이 있습니다.
다우치 치즈코.
그녀는 조선총독부 관리였던 아버지를 따라
7살, 어린 나이에 목포로 건너와 고등학교 졸업 후
목포의 고아원이었던 '공생원'에서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공생원을 설립한 윤치호 전도사의 인품에 반해
결혼을 결심합니다.
일본 관리의 딸이 '거지대장'이라는 별명을 가진 전도사와
결혼을 한 겁니다.
둘은 열렬히 사랑했지만 행복도 잠시,
윤치호 전도사는
공생원 고아들이 먹을 식량을 요청하러 떠났다
소식이 끊기고 맙니다.
홀로 남겨진 윤학자 여사는
남겨진 고아들을 지키기 위해
직접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식량을 구했고
닥치는 대로 일했습니다.
그녀는 행여 실수라도 일본말을 하지 않고
친자식보다도 더 고아들을 사랑했던 강한 여인이었다고
당대 사람들은 그녀를 추억합니다.
그녀의 열정이 통한 것일까요?
1965년 윤학자 여사는
일본인을 향한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제1회 목포 시민 상을 받습니다.
국경을 뛰어넘은 사랑이 전국에 널리 알려진 겁니다.
30년간 고아 3천 명을 길러낸 윤학자 여사.
홀로 얼마나 힘겨웠을까요.
그녀는 결국 병으로 쓰러집니다.
병상에서도 그녀는 오직
아이들 걱정뿐이었습니다.
"우메보시가 다베타이" ... 메실짱아찌가 먹고 싶구나!
실수라도 일본어를 쓰지 않았던 그녀가
눈을 감기 직전에 남긴 한 마디였습니다.
낯선 땅에서 떠나온 조국이 그리웠을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의 떠나자 한국 전역에 애도의 물결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목포시민들은 지금도 윤학자 여사를 진심으로 그리워 합니다.
삶을 송두리째 한국 땅에 바친 윤 여사.
그녀는 죽어서도 한국 땅에 묻혀
한국의 흙이 되길 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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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바쳐 한국을 사랑한 사람.
서성평 선교사와 윤학자 여사.
그 사랑이 한국 땅에서 한 알의 밀알이 돼
또 다른 생명들을 피어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낮아짐의 길보다는
편리와 높아짐만을 추구한 것이 아닌지
고개가 저절로 숙여집니다.
CGN투데이 주영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