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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130주년, 선교사의 발자국> 스크랜턴

1377등록 2015-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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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멘트]
“ 제가 오늘 파송받은 것은 희생이 아니라
특혜입니다. 고난이 아니라 분에 넘치는 명예라고 믿습니다. ”
의사이자 선교사였던 윌리엄 스크랜턴이
한국으로 파송될 때 했던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들 뒤에는
한국에 먼저 헌신한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이 있었습니다.

1885년, 50이 넘은 나이에 한국에 와
신여성 교육의 효시, 이화학당을 세우고
24년 동안 천대받던 조선 여성들에게
배움의 길을 선물했던 메리 스크랜턴의
감동적인 삶을
이주희 기자가 전합니다.

[리포트]
안으로는 봉건체제의 낡은 틀을 깨뜨리겠다는
급진 개화파의 움직임으로
밖으로는 무력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는
구미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 위협이 높아
안팎으로 진통을 겪어야 했던
조선후기.

이 위태롭던 조선 땅을 밟은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미국 매사츠세츠주 벨쳐타운에서 목사의 맏딸로 내어나

1884년 미국 감리교 여선교회로부터 파송을 받아
그 이듬해 한국 땅을 밟은
메리 스크랜턴이 그 주인공입니다.

1885년. 그녀의 나이 쉰 넷.

그 해는 한국 최초의 교회인
내리교회의 모태가 된 초가집에서
우리나라 최초 선교사 아펜젤러부부가
감격의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해이기도 한데요.

비슷한 시기에 한국 땅을 밟은 메리 스크렌턴은
버려진 여자 어린아이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이화학당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남녀가 평등하다는 개념은 꿈조차 꿀 수 없었지만
그녀는 가난하고 천대받는 여성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 여성 신교육의 효시가 됐습니다.

4명으로 시작한 이화학당.

파란눈의 낯선 외국인을 두려워하는
소녀들에게 다가가 맛있는 과자를 주고
침모를 불러 붉은 무명천의 치마와 저고리를 만들어 입혔는데

그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교복이 만들어진 계기였습니다.

이렇게 경계심 가득한 이 땅의 여성들이
경계심을 풀고 배움의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노력했던 메리 스크랜턴.
그의 행동은 항상 겸손하고 정중했기에
그런 그녀의 모습에 감동받아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신혼 3일 만에 과부가 된 이경숙은
스크랜턴 선교사의 마음과 행동에 감동받아
이화학당이 배출한 한국인 최초의 교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자신 뿐 아니라
훌륭히 키운 의사 아들과 며느리도
함께 한국 땅에 헌신토록 했습니다.

한국인을 한국인보다 더 사랑한
메리 스크랜턴,
풍토병에 걸려 미국에 잠시 들어가 치료를 받고
한국에 다시 선교하려 할 때 그녀의 나이는 이미
선교사 정년인 70세였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한국 사랑은 아무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인터뷰[이덕주 교수 / 감리신학대학교]

24년간 한국에서 여성의 교육과 복지, 영혼 구원을 통해
혼신을 다하다 1909년, 76세에 하나님의 부름심을 받고
양화진에 안장됐습니다.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가
자신의 작은 집을 열어 갈 곳 없는 여학생을 돌보며
기도로 시작한 이화학당은 이제 123세가 됐고

스크랜턴의 정신을 이어받은 수많은 여성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배출되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파송 받는 것은 희생이 아니라
특혜입니다. 고난이 아니라 분에 넘치는 명예라고 믿습니다.“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이
뉴헤븐제일 장로교회에서 파송 식을 하던 날 했던 말입니다.

부와 명예, 안락한 생활을 뒤로하고
작고 약한 한국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메리 스크랜턴과 그의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
>인터뷰[이덕주 교수 / 감리신학대학교]

그들은 더 낮은 곳으로, 땅끝으로 가 죽음까지 무릅쓰고
예수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인터뷰[이덕주 교수 / 감리신학대학교]

그들의 삶이
지금 처한 현실이 힘들다 불평하는 우리에게
고난이나 환경이 절대로
우리의 소명과 사명을 꺾어서는 안 된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CGN투데이 이주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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