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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선교130주년, 선교사의 발자국> 채핀부부의 위대한 사랑

1262등록 2015-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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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멘트>
짧아서 더 긴 여운을 남긴 사람, 채핀...

그리고 내조자가 아닌, 동역자로써
남편이 못다한 한국사랑을
평생에 걸쳐 실천한
한국 최초의 여성목회자,
안나 채핀...

오늘은 채핀 부부가
이 땅에 새긴 사랑의 발자국,
그 깊이를 느껴보시죠.

<기사>
나라의 주권을 빼앗겨 슬픔에 잠기 한 작은 나라에
미국 선교본부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바다를 밟고 와
아픔을 온 몸으로 어루만진 파란 눈의 이방인이 있었습니다.
바로 빅터채핀과 그의 부인 안나 채핀이 그 주인공입니다.


1913년.미국 감리교 목사였던 채핀은
그의 아내 안나 채핀,
처재 로사 베어와 함께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한국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말에
아무 연고도 후원도 없이 소명하나로
언어도 안 통하는 낯 선 땅에 온 겁니다.

채핀 부부는 미국 감리교 출신, 킬본이란 사람이 만든
동양선교회에서 사례비도 한 푼 없는 막막함 속에서
활동을 시작하다

언더우드의 선교사의 일을 도와
지금의 연세대학교를 짓는데 혼신의 힘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1916년, 한국에 온 지 3년 만에 과로로 쓰러져
하늘나라로 가고 맙니다.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하고
열정적으로 설교했던 그를 많은 사람들이 그리워했고
후에 그의 성경책과 일기를 접하게 된
기독신보 기자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신구약은 물론이고 창세기부터 묵시록까지 각 장마다
푸르고 붉고 검은 줄과 동그라미를 표하지 아니한 곳이 없으며...
그가 얼마나 성경을 사랑하고 묵상했는지를 알 수 있는 구절입니다.

짧아서 더 긴 여운을 남긴
채핀의 열정은 그의 아내
안나 채핀이 그대로 이어받습니다.

남편과의 사별 후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부요할 부, 어질인, 채 부인이라 칭하고
이름처럼 풍부한 사랑을 한국에 쏟아 부었습니다.

피아노를 전공했던 그녀는
오르간을 가르치며 전도에 힘썼고
여성 지도자를 키워 나갔습니다.

1931년...
미국에서도 여성 목회자를 인정하지 않던 시기
채부인이 한국의 첫 여성 목회자로 안수를 받았다는 사실만 봐도
그녀의 삶이 얼마나 감동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함께 한국에 온 여동생이 1938년
뇌 질환으로 사망하자
동생 베어 선교사가 사역했던
천안 지역의 상처받은 영혼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던 채부인.

그녀는
제자들이 그녀의 선교 33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잔치를 열겠다고 했을 때도
오히려 자신이 가진 전 재산 5천 달러를 내 놓으며
잔치대신 여성 은퇴 교역자를 위한 안식 관을 지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었습니다.

그녀의 나이 일흔 살.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1953년...
그녀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구호물자를 나르고 영혼을 어루만졌습니다.

삶을 돌보고 영혼을 돌보았던 그녀는
이 땅의 여성해방과 양성평등 뿐 아니라
복음은 교리가 아닌, 삶으로 전해지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1977년, 93세의 일기로 눈을 감을 때도
그녀는 남편과 여동생이 묻힌 한국 땅에 잠들길 원했습니다.

죽어서도 한국에서 살고자 했던 채부인
협성여자신학교의 초대교장

한국 최초의 여성 목회자라는 이름 뒤에는
자신의 삶을 한국 땅에 송두리째 던진
‘풍성한 사랑’ 이란 이름이 깊게 새겨 있습니다.

낯선 땅에 대한 두려움을
감사와 사랑으로 덮었던 채핀 부부의 삶이
풍요로움 속에서 감사를 잊은 채 살아가는 우리에게
위대한 울림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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