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핵이라고 하면 흔히 위생과 영양이 불량해 생기는 후진국 병으로 알고 있지만 지금도 우리나라 국민 3만에서 4만 명가량이 결핵 환자라고 합니다.
이 무서운 전염병은 일제시대엔 더욱 대표적인 질병이었는데요. 이 질병과 맞서 한국인을 돌보았던 외국인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선교 130주년 보도특집, 선교사의 발자국. 오늘은 홀 선교사 가족의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리포트]
외래환자 중 30%가 결핵 환자. 매년 5만 명이 결핵으로 사망... 1920년대, 세브란스 병원의 통계 수칩니다.
일제의 탄압만큼이나 결핵이 무섭고 끔찍했던 시절. 해주에 결핵요양원을 세우고 한국 최초로 남대문이 그려진 크리스마스 씰을 보급하다
1940년 크리스마스 씰로 독립자금을 모았다는 등. 일제가 꾸민 간첩혐의로 체포된 한 캐나다 인이 있었습니다. 바로 기독교조선감리교회 셔우드 홀 선교사 입니다.
사업가가 되고 싶었던 그가 한국에서 결핵 퇴치에 힘쓴 의료 선교사로 16년을 살았던 데는 한국에 온전히 헌신한 윌리엄 제임스 홀과 로제타 셔우드 홀, 부모의 영향이 컸습니다.
[인터뷰] 이덕주 교수 / 감리교신학대학교
부인이 먼저 와요. 로제타 셔우드 홀. 그 땐 독신으로 오죠. 1887년, 처음으로 최초의 여성 전용병원으로 보구여관이란 병원을 세우고 하워드라고 하는 여성 의사가 와서 병원을 문을 열고 비로소 여성 환자들을 치유하는데 이 분이 일 년 만에 풍토병으로 돌아가세요. 병원이 폐쇄될 위기에 처한 거죠. 그 때 뉴욕에서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갓 의사가 된 로제타 셔우드라고 하는 여성이 자원해서 들어옵니다. 그래서 1889년에 다시 문을 열었는데 그 때 이미 약혼자가 있었어요.
한국에 여자 의사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사랑하는 이도 뒤로하고 한국 땅을 밟았던 로제타 서우드 홀.
결국 미국 할렘가에서 의료 활동을 하던 약혼자 윌리엄 제임스 홀(캐나다출신)까지 그녀를 따라 한국에 오게 됩니다.
1892년 6월 21일 벙커 선교사의 주례로 치러진 그들의 결혼식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결혼식이 됐습니다.
그 후 1893년... 한 살도 안 된 아들과 함께 평양에서 시작한 의료 선교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강도 만나 쓰러진 사람을 가진 돈을 전부 털어 치료한 후 배고픔과 추위와 싸우며 몇 주를 걸어 도착한 평양에선 낯선 이방인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돌팔매를 맞을지 모르는 위험에 처했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습니다.
1894년 7월, 평양은 청일전쟁으로 환자가 속출했는데 불철주야 환자를 돌보다 그만... 윌리엄 셔우드 홀은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남겨둔 채 전염병에 걸려 죽고 맙니다. 그 때 그의 나이 서른다섯. 로제타 셔우드 홀의 나이 스물아홉이었습니다.
당시 임신 중이었던 로제타 셔우드 홀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인터뷰] 이덕주교수 / 감리교신학대학교
남편 장례식 치르고 미국에 돌아갔다가 3년 만에 돌아오는데 돌아올 때 남편을 기념하는 병원을 세우려고 모금 운동을 3년 동안 한 거예요. 평양에 돌아가서 남편을 기념하는 병원을 세우고 미국에 3년 동안 있으면서 맹인 학교에 들어가요. 점자를 읽는 것 뿐 아니라 점자를 만드는 것 까지 배워가지고 오죠.
평양에서 남편이 처음 얻은 교인의 외동딸이 앞을 못보는 맹인 이었는데 아버지를 따라 매 주일 손잡고 오는 맹인소녀를 보고 맹인 교육을 할 생각을 하게 됐고 다시 돌아와 점시작한 사역에 우리나라 최초의 맹인 교육이 된거죠.
두 자녀와 함께 돌아온 한국에서 그녀는 다시 사랑하는 어린 딸을 잃고 맙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슬픔에 사무쳐 있던 그녀에게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습니다.
후에 그의 아들 셔우드 홀은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 엄마는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잊어야 하는 아픔이기 때문이다. “ 딸을 잃은 그녀의 슬픔이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그녀의 한국사랑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삶을 우리는 이렇게밖엔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삶 전체가 감동이었던 사랑의 사람이었다고...
[인터뷰] 이덕주교수/ 감리교신학대학교 삶 전체가 감동이에요. 남편이 죽은 그 땅에서 남편이 하던 그 일을 40년을 함. 사랑의 사람이에요. 예수 사랑밖엔 없어요.
동학농민운동, 청일운동 등. 한국의 격동기에 찾아와 1951년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사랑하는 이를 잃어가면서도 수많은 간호사를 양성하고
여성의료의 기초를 닦았던 그녀의 한국 사랑이 지금도 멈추지 않는 파도가 돼 우리 가슴을 요동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