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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130주년, 선교사의 발자국> 한국 고아의 대부, 소다가이치

1449등록 2015-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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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멘트]
선교사가 아니었지만 선교사들이
묻힌 양화진에 함께 잠들어 있는 사람.

주권을 빼앗긴 한국땅에 찾아와
함께 고통을 감내했던 사랆.
바로 일본인, 소다 가이치의 얘깁니다.

선교 130주년 보도특집, 선교사의 발자국,
오늘은 한국 고아의 대부로 불리는
한 일본인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리포트]

한국을 사랑한 417명의 영혼이 잠든 땅, 양화진.
파란 눈의 선교사들이 대부분인 이곳에서
유일하게 일본인 부부의 묘역이 눈에 띕니다.

바로 41년을 한국의 고아들을 위해 헌신한 소다가이치
또 그의 아내 우에노 씨가 잠들어 있습니다.
일본 아마구치현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소다가이치는
사실 선교사도 아니었습니다.

1893년 고향을 떠나
홍콩과 동남아 일대를 방랑하며 살았던 소다가이치.

‘술로 세월을 보내는 방랑자’가
당시 그를 표현할 수 있는 수식입니다.

그러던 중 1899년 어느 날...
대만의 한 도시에서 그는 그만 술에 취해 쓰러지고 맙니다.

[인터뷰] 이덕주교수 / 감리교신학대학교
길거리에 버려져서 죽어갈 수 있는 상황인데 어떤 조선 사람이 그를 돌봐줍니다.
그 조선 사람이 누군지 몰라요. 이름도 몰라요.
그런데 그가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 인거예요.
조선에 대한 마음을 품기 시작한 거죠.

생명을 구해준 은인.
이름 모를 한국인을 찾기 위해
조선을 찾아온 소다 가이치.

당시 조선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주권을 빼앗긴, 그야말로 강도만난 나라였습니다.

[인터뷰] 이덕주 교수/ 감리교신학대학교
조선에 대한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자기 조국인 일본에게 유린당하는 것을 알고
미안한 마음에 1905년 한국에 와요. 그 때는 교인이 아니었어요.
단지 7년 전에 자신을 구해 준 조선에 보은을 하기 위해 온 거예요.

무작정 찾아온 조선에서 그는 황성기독교청년회,
지금의 YMCA에서 일본어 교사로 일하며
이상재, 유성준, 윤치호 등의 독립투사를 만나
조선의 처참함에 더 눈을 뜹니다.

특히 이상재 선생을 만나 성경을 배우고
경성 감리교회 전도사가 된 건 오직 주의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 41년을 한국의 고아들을 위해 살기로 작정합니다.
젖동냥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이덕주교수 / 감리교신학대학교
버려진 조선 아이들을 하나 둘 업어다가 키우기 시작합니다.
일본 사람들에게도 오해를 많이 받았고요.
조선 아이들 업고 가면 어디가 팔아먹으려는 게 아니냐고 해서 돌도 많이 맞고...

경성고아원을 만들어
일본 최고의 가마꾸라 보육원의 한국 책임자가 된 그가
해방 전까지 길러낸 고아만 수천 명.

그의 혼이 깃든 그 곳이 바로
해방 직 후 한경직 목사가 운영한 영락 보린원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이상재 선생이 주도하던 ‘백만인 구령운동’에 동참.
1911년, 105인 사건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데라우찌에게 억울하게
투옥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
3.1운동 당시 일본의 대법원장 와타나베를 만나
총독부의 만행을 규탄.

한국의 아픈 시기에 찾아와
한국인의 독립을 위해 누구보다 앞장섰던 그에게
한국정부는 일본인 최초로
문화훈장을 수여합니다.

1962년 9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한국인과 고통을 함께한 소다가이치.

또 한 번의 3.1절을 보낸 지금.
그의 헌신이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는
성경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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