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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130주년, 선교사의 발자국> 죽음과 공포의 땅을 성지로 ‘헤론’

1158등록 2015-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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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커 멘트 ▶

‘제중원’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으로
알렌선교사가 지었다는 사실은 잘 알고 계시죠?

당시 사람의 속도 열어 고치는데
고장 난 시계도 고칠 수 있지 않느냐며
제중원을 찾아온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당시 한국인에게
서양 선교사들의 외과 의술은 신세계였는데요.

서양의 의료기술을 전파한
초기 의료 선교사들의 삶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그들이 철저히 낮은 자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선교 130주년 보도특집, 선교사의 발자국'
오늘은 알렌 선교사를 도와 환자들을 돌보다
양화진에 가장 먼저 묻힌
헤론 선교사의 삶을 돌아봅니다.

◀ 리포트 ▶

1885년 4월 한양 한가운데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 제중원.

1876년 조선이 문호를 개방한 후
고종의 승낙을 받아 알렌 선교사가 세운
제중원의 외과 의술은
조선인들에겐 그야말로 신세계였습니다.

개원 1주년을 맞아 작성한 1차년도 보고서.
진료하고 수술한 환자가
근대 의학 질병분류법에 따라 상세히 기록돼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알렌 선교사가 썼던 검안경이
당시 백내장수술도 가능했던 것을 말해줍니다.

[박형우 교수/ 연세대학교의과대학: 종교, 사회 배경상으로는 유교가 지배하는 사회였죠.
그래서 부모님이 주신 손톱이나 머리카락을 안잘라. 그런데 서양사람이 칼들고 와서 째고 그러니까(이상하게 생각됐겠죠.) 그런데 당장은 아픈데 몇일 지나면 깨끗이 낫거든요.(민영익이 알렌에게) 당신 하늘에서 보내준 사람 아니냐.]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백성이 진료 받을 수 있었던 제중원의
하루 최고 환자 수는 260여 명.

사람들은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고
1885년 6월 합류한 헤론선교사.
사실 헤론은 미국 북장로회가 임명한
최초의 선교사였습니다.

<오는 25일 나오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박형우 교수의 논문에는
헤론이 한국을 찾을 당시의 이야기가 자세히 기록돼 있습니다. >

[박형우 교수/ 연세대학교의과대학: 헤론이 직접 쓴 (선교)지원 편지가 있을 거 아니에요. 미국 아카이브스 문서보관서에서 찾아왔거든요. 맥 윌리엄스라는 사람이 한국 선교를 시작한다면 5천 달러를 기부하겠다고 했어요. 미국 북 장로회가 사람을 물색하다가 헤론이 선택됐고 헤론이 북 장로교, 더 나아가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였는데 알렌이 끼어들어서 알렌이 제일 먼저 들어왔고 헤론은 뉴욕에서 연수를 더 받은 후 결혼하고 6월에 들어와요.]

테네시대학교 개교 이래
최우수성적이라는 영예를 안고 졸업한 헤론에게
학교는 교수직을 제안했지만
그는 보장된 장래, 안정된 길을 포기했습니다.

고종의 신임을 얻어 궁중도 드나들었던 헤론.
길거리 환자들도 똑같이 치료했던 그가
한국을 찾은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이덕주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 궁극적인 목표는 복음. 예수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스스로 낮아졌죠. 고종황제의 신임을 얻었지만 사리사욕을 채우지 않고 낮아짐을 택한 겁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시장 바닥에 버려진 환자들을 치료했어요.
지방을 다니면서 치료했어요. 당시 자동차가 있어요. 교통편이 있어요.
열악한 환경 속에서 다니면서 치료한 거죠. ]

조선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불철주야 쉼 없이 일했던 헤론.
내한한지 5년 만에 중병에 걸리고 맙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양화진에 묻힌 선교사가 됐습니다.

[이덕주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 고종황제가 여름별궁으로 쓰던 남한산성에서 요양하라고 내줬어요. 한 달 동안 요양하고 몸을 추스르고 서울에 오자마자 30리 밖에 환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환자를 치료하러 갔어요. 그 환자에게서 병이 옮아 죽음을 맞이한 거죠. ]

130년 전 한국을 찾아와
가장 먼저 이 땅에 묻힌 헤론 선교사.
살아서도 황폐한 영혼을 위한 살았던 그는
죽어서도 당시 죽음과 공포의 땅이었던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이덕주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 열병으로 돌아가셨는데 시신을 어디에 묻을 것인가가
문제가 됐어요. 그가 고종황제의 사랑을 받았고 조선 정부로부터 벼슬도 받았지만
조선의 전통에 의하면 시신을 되도록 고향에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묻는 것이 조선의 장례법이에요. 그래서 당연히 미국으로 시신을 가져갈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조선에 묻히길 바라는 거죠. 서양인들은 자기가 출석하던 교회 앞마당에 묻히잖아요. 그래서 돌아가신지 한 달이 됐는데도 어디에 묻을 것인가를 두고 선교사들 사이에서 합의가 안 됐어요. 결국 타협이 된 것이 양화진이에요. 버려진 땅 그 곳을 조선 정부가 내 준 거죠. 지금은 한국의 성지가 됐잖아요. 죽음과 공포의 땅을 가장 복된 땅이 된 거죠.

낮은 자리, 고된 자리를 자처했던 헤론의 마음이
높은 자리, 편한 자리를 탐하는 우리에게
주의 마음을 회복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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