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영상 소개
◀ 앵커 멘트 ▶
제중원하면 흔히 알렌을 떠올리시죠.
지난 주 선교사의 발자국에서는
제중원의 2대 원장,
헤론선교사의 삶을 들여다봤는데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또 한명의 의료 선교사가 있습니다.
선교 130주년 보도특집, 선교사의 발자국.
오늘은 존폐위기에 처한 제중원을 다시 살리고
한국 최초로 현대식 종합병원을 세운
에비슨 선교사의 삶을 들여다봅니다.
◀ 리포트 ▶
1885년 고종 22년.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으로 세워진 제중원.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백성을 치료하던 의료 기관이자
선교사들이 모여 한국 선교의 방향을 논하던 전초기지였습니다.
하지만 조선인들의 큰 환영을 받았던 제중원은
2대 원장인 헤론이 내한 5년 만에 일찍 세상을 떠나고
빈턴으로 이어지면서 위기에 처하고 맙니다.
당시 캐나다에 방문한 언더우드로부터
한국 선교 상황을 듣게 된 올리버 에비슨이 한국선교를 결심했습니다.
수년간 방직공장에서 일할 정도로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해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교수로 재직 중이던 그에겐
큰 결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용민 연구이사/한국기독교역사학회]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를 거쳐
40년 이상을 한국에 머무는 동안
의학교를 본격적으로 운영하고
한국 현대 의학과 병원의 기틀을 마련한 에비슨.
그는 반 국영으로 운영되던 제중원을
온전히 해외 선교부 소속 민간 병원으로 바꿔
당시 제중원을 어렵게 만들었던 고위 관료들의 횡포를 끊어내고
1895년 전국에 콜레라가 창궐하자
예방 법을 쓴 소책자와 유인물을 인쇄해
일반인에게 나눠주고
천연두, 학질, 진티푸스,, 광견변 등의 치료법을 모색했습니다.
조선의 열악한 공중보건을 개선해
하수시설을 정비하는 등 위생 관념이
생긴 것도 이 때부터였습니다.
[이용민 연구이사/한국기독교역사학회]
무엇보다 1900년 4월.
뉴욕에서 열린 에큐메니칼 선교사 대회에서
현대식 종합병원 설립의 필요성을 알린 애비슨 .
세브란스의 지원을 받아 종합병원을 설립한 것은
한국의 의학 발전에 기여할 뿐 아니라
선교에 대한 편견을 없앤 중요한 사례이기도 합니다.
[이용민 연구이사/한국기독교역사학회]
고종의 주치의로써 궁중을 드나들었던 에비슨.
당시 이름조차 갖지 못했던 백정도 똑같이 치료했습니다.
후에 박성춘이란 이름을 갖게 된 백정의 아들 박서양은
세브란스가 배출한 한국 최초의 외과 의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국경과 문화, 교파와 신분을 넘어
겸손히 환자를 섬겼던 그의 말과 행동은
우리게에 진짜 의사, 진짜 선교사의 모델을 제시해줍니다.
[이용민 연구이사/한국기독교역사학회]
1935년 12월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의료와 보건위생 시설을 개선하고
후학양성, 신분철폐에 힘쓸 뿐 아니라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음으로 양으로 애썼던 에비슨의 마음은
그의 넷째 아들 더글라스 에비슨에게 이어졌습니다.
신사참배에 항거했다는 이유로 강제 추방당한 아들이
‘한국 땅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32살 젊은 나이에 한국에 와
조선인의 상처를 싸맸던 에비슨의 마음이
이 고난주간.
소외되고 병든 자들과 함께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더욱 생각하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