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의 3·1운동 이후 크게 놀란 일본이 조선의 식민 통치를 이어가기 위해 민족 말살 정책을 지독하게 펼쳤는데요.
이로 인해 스스로를 천시여기고 자주성을 잃어가던 조선인들에게
우리가 가진 문화와 정신이 위대하다고 말해주던 한 이방인이 있었습니다.
<선교 130주년 보도특집, 선교사의 발자국> 오늘은 조선인의 우수성과 가치를 일깨워주고 해외 여러 나라에 널리 알렸던 제임스 스카일 게일 선교사의 삶을 전합니다.
◀ 리포트 ▶
1886년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대학생 여름수련회. 부흥사 무디의 설교를 듣고 감동해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제임스 스카스 게일. 한국명 기일 선교사입니다.
1983년 한국에 와 어렵게 선교하다 1년 반 만에 죽음을 맞이했던 맥켄지 선교사의 이야기가 캐나다 전역을 강타한 후 캐나다 북 장로회가 본격적으로 한국에 선교사 파송을 하던 시기.
그는 1888년 YMCA 지원을 받아 단독으로 들어왔습니다.
[이용민 연구이사/한국기독교역사학회 : 게일은 특이하게 단독으로 한국에 들어옵니다. 그러다가 서울에서 언더우드 같은 선교사를 만나면서 캐나다의 지원이 끊기고 장로교 소속으로 변경했습니다. 그렇게 왔던 선교사 중 하디라고 있었는데 하디는 토론토 와이엠씨로 와 감리교 선교사로 갔고 게일은 장로교로....]
한국 최초의 매서인 서상륜의 집에 머물며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게일. 철저히 한국음식만 먹으며 조선인의 생활을 익혀갔습니다.
당시 성경은 로스 선교사를 도와 조선인들이 만주에서 번역한 것을 쪽 복음으로 어렵게 들여와 읽고 있던 실정. 어법이 틀리고 사투리가 섞여 있어 해석하는데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언어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났던 게일은 우상을 섬기던 조선인에게 ‘유일한 한 분’ 이란 뜻을 담아 최초로 하나님이란 이름을 사용하게 했고 성경을 재 번역하는 과정에 참여해 끝까지 함께했습니다.
[이용민 연구이사/한국기독교역사학회 : 선교사들이 성경을 번역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한국인들이 읽기 쉽게 만들기 위해 한 번 출판하면 2천부, 4천부, 6천부 이렇게 성경을 발간했는데 전국교회에서 모자랄 정도로 활용도가 높았습니다. 각 교회 마다 성경공부 모임이 있어서 한 교회에서 성경공부 모임이 있다고 하면 주변 교회에서 모두 모여 며칠 씩 숙박을 해가면서 성경을 공부를 했으니 성결이 모자랄 만 한 거죠. 1900년대 신약이 완간 되고 1910년도에 구약이 완역 됐을 때 성경이 발간 되는대로 팔려나갔습니다. ]
뿐만 아니라 1897년 조선에 온지 9년 만에 최초의 영어사전인 한영대자전을 출간. 한국의 단어를 규합해 옷 편을 만드는 등. 조선인들 스스로 천시하던 우리글의 우수성을 알리는데 누구보다 앞장섰습니다.
[이용민 연구이사/한국기독교역사학회 : 성경을 번역하면서 한글에 대해 공부. 한글을 공부하면서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알게 됐습니다. 그런 한국의 역사와 문화가 일제하에 잊혀져가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연구하고 학문적 수준으로 체계화 시키는데 노력한 학자 형 선교사였습니다. 구운몽, 춘향 전 같은 고대소설도 영어로 번역해 해외에 소개하고 자신이 사역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갈 때는 이규보라는 고려시대 문인의 전집을 들고 갔을 정도였습니다. 또 캐나다에 돌아가서도 계속 번역 작업을 해서 출판된 책들도 있을 정돕니다. ]
한편 그가 한글로 번역한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당시 억울하게 투옥된 독립운동가 이상재 선생을 감화시키기도 했습니다.
연동교회 담임으로 취임하려던 기보 목사가 병으로 세상을 뜨자 원산에서의 사역을 접고 연동교회 1대 담임 목사로 취임하게 된 게일.
121년 역사를 지닌 연동교회 역사관에는 그의 노력과 삶의 흔적들이 깃들어 있습니다.
[조수한 부목사 / 연동교회 : ]
[이용민 연구이사/한국기독교역사학회 : 연동교회에 처음 왔을 때 서울에서 처음 세웠던 학교가 선교부 비용으로 운영하기 힘들어 폐쇄됐는데 게일이 살렸습니다. 그것이 경신여자 중고등학교이고 여학교도 폐쇄됐는데 지금의 정신여고입니다. YMCA같은 지부를 만드는데도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청년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고 게일이 앞장선 것이 게일이었습니다.]
양화진에 가장 먼저 묻힌 파란 눈의 선교사 헤론의 미망인과 결혼한 게일. 그의 삶 구석구석에서 약자한자, 어려운 자를 보고 외면하지 못했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용민 연구이사/한국기독교역사학회 : 호주의 데이비스 선교사라고 있었는데 남매가 선교사로 왔습니다. 서울에서 잠시 활동을 하다가 부산에 임무를 맡고 갔을 때 갑자기 데이비스가 죽게 되죠. 그 때 돌봐줬던 사람이 게일이고 여동생이 마음을 추스르고 계속 한국의 선교사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사람이 게일. 어려움에 처해있는 사람을 방치해두지 않고 직접 문제를 해결하고 거기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는 삶의 흔적들을 갖지 않았나.
천민과 양반을 모두 아우르고 한국의 고유문화와 역사, 말과 글, 마음속에 품은 선한 것들을 볼 줄 알았던 게일 선교사. 선교의 초심을 잃고 토착인 위에 군림하려는 우리에게 선교란 구제를 뛰어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동역이란 진리를 다시금 깨우쳐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