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넷, 꽃다운 나이에 한국에 와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한 여성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아쉽고 애달플만큼 짧은 삶이었지만 그녀가 남긴 유언은 미국 텍사스의 많은 젊은이들을 선교사로 헌신토록 했는데요.
선교130주년 보도특집 선교사의 발자국. 오늘은 그 어떤 생명보단 강한 죽음의 능력을 보여준 루비 켄드릭의 삶을 전해드립니다.
◀리포트▶
“만일 내게 천(千)의 생명이 있다 해도 조선에 바치리라”
스물다섯,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루비 켄드릭 선교사의 묘비명 앞에서 고개가 저절로 숙여집니다.
1883년 1월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난 켄드릭선교사.
1905년 캔자스 여자성경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 남 감리교 선교부를 찾아 조선 선교사로 가겠다고 자원하지만 선교사 파송 연령 제한에 걸리고 맙니다.
할 수 없이 기도하면서 2년을 준비해 1907년 감리교회의 청년운동인 텍사스 청년연합회에서 활동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토록 염원하던 조선 선교사로 미국 남 감리교회 해외 선교부의 정식 허락을 받아 내한했습니다.
딸을 염려한 부모의 반대를 무릎 쓴 용기 있는 결정이었습니다.
[이덕주 교수 / 감리교신학대학교 : 스무 살 이전부터 해외 선교사로 나가겠다는 결심을 하고 선교본부에 계속 요청을 했는데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2년 동안 지연되다가 9월에 텍사스 에버 청년회라고 감리교 천년단체입니다. 거기서 파송을 한 거죠. 독신여자 선교사이기 때문에 1907년 24살에 왔거든요.]
도착하자마자 낮선 한글을 배우고 개성에서 학생들에게 성경과 영어를 가르치며 아픈 아이들을 간호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이덕주 교수 / 감리교신학대학교 : 동료선교사들 얘기에 의하면 항상 여학생들을 지칭할 때 “내 사랑하는 조선의 동생들” 이라고 칭했다고 합니다. 여동생을 돌보듯이 여학생들을 돌봐줬던 거죠. ]
켄드릭선교사가 숨을 거두기 전 텍사스에서 엡워스청년연합회로 날아온 편지는 그녀의 유언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비록 짧은 삶이었지만 조선인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켄드릭 선교사였습니다.
[이덕주 교수 / 감리교신학대학교 : 동료 선교사들에게 서울에서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기 전에 남긴 유언이 내가 죽거든 내 시신을 고향, 텍사스에 가져가지 말고 내가 예수를 전하기 위해 왔던 이 땅, 사람들 속에 묻어달라고 했습니다. 이 분은 그리스도인으로써 한국에 와서 보여준 것은 죽음의 모습을 보여 준 것 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죽음의 모습이 굉장히 감동적인 거죠. ]
그녀가 죽은 후 그녀를 파송했던 웹워스청년연합회는 12만 달러를 모아 켄드릭추모기금을 조성했고 그녀의 유언을 따라 여성 선교사 12명을 한국으로 파송했습니다.
[이덕주 교수 / 감리교신학대학교 : 마지막 편지가 텍사스에 도착했을 때 텍사스 에버 청년회 대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날 20명이 선교사 지원을 한 거예요. 그 중에 한국에 온 분들도 있고 아시아나 아프리카, 다른 나라에 간 분도 있고. 그 분들이 양화진에 묻힌 켄드릭 선교사의 묘비를 우리가 세워주자. 묘비가 가보면 알겠지만 포도송이 모양이에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 그래서 텍사스가 2차 세계대전 끝날 때까지 한국에 계속 선교 비를 보내줬고 선교사를 파송했고 한국 뿐 아니라 아시아나 아프리카 다른 나라에도 선교사를 보내는(일을 했죠)]
이 땅에 뿌려진 청년의 뜨거운 피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두드렸던 삶의 계산기를 모두 내려놓고 무릎으로 나아가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