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간.. 매년 5천 명씩 환자를 진료한 그녀의 뒤에는 공부를 가르쳤던 메리스크랜튼 의사로써의 사명감을 몸소 일깨운 홀 선교사 부부. <14세에 셔우드 선교사의 통역과 간호 보조로 일함> 급성 폐결핵으로 죽음을 맞기까지 아내의 의대 공부 뒷바라지를 했던 남편 박유산이 있었습니다.
[하희정 박사 / 감리교신학대학교]
최초의 여성 문학사로 신여성의 대명사로 부리는 하란사.
인천 감리의 부인으로 평범하고 안락하게 살 수 있는 그녀를 이화학당에 보낸 건 바로, 그녀의 남편이었습니다.
당시 기혼 여성을 받지 않던 이화학당이었지만 그녀의 배움에 대한 열정은 당시 교장을 맡고 있던 프라이의 마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이 후 일본과 미국유학까지 다녀온 하란사는 귀국 후 상동교회 안에 있던 부인영어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1910년 9월 이화학당의 유일한 한국인 교사가 됩니다.
상동교회 진덕기 목사와 정동교회 손정도 목사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1910년 후반부터 민족운동에도 뛰어듭니다.
[하희정 박사 / 감리교신학대학교]
최초란 수식어보다 헌신이 더 빛났던 초기 여성들.
기독교는 여성들의 공적인 영역을 일깨웠습니다.
[하희정 박사 / 감리교신학대학교]
몸 아픈 여성들을 위해 헌신하다 30대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박에스더.
독립운동을 하다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하란사.
처음이란 수식어를 달게 된 초기 기독교 여성들의 삶 뒤에는 ‘나’보다 ‘우리’를 앞서 생각했던 마음이 있었습니다.